在獄詠蟬

2022. 8. 6. 20:15漢詩를 맛보다

<在獄詠蟬 序>

 余禁所禁垣西 是法廳事也  有古槐數株焉 雖生意可知  同殷仲文之古樹 而聽訟斯在 即周召伯之甘棠

내가 갇혀 있던 곳의 감옥 담 서쪽은 법관들이 공무를 처리하는 곳이었다.

늙은 홰나무 몇 그루가 있었는데 살려는 기운이 있음을 알 수는 있었지만 은중문(殷仲文)의 늙은 나무와 똑같았고 여기서 송사를 처리하니 주나라 召伯의 감당나무인 셈이었다.

每至夕照低陰 秋蟬疏引 發聲幽 有切嘗聞 豈人心異於曩時 將蟲響悲於前聽

매양 저녁노을이 낮게 깔린 나무 그늘에 비출 때면 가을 매미가 계속 우는데, 소리가 깊이 탄식하는 것 같아서 일찍이 들었던 것보다 더 간절했.

아마도 사람의 마음이 종전과 달라서 혹 벌레 소리가 이전에 듣던 것보다 슬퍼서였을까?

 嗟乎 聲以動容 德以象賢 故潔其身也 稟君子達人之高行 蛻其皮也 有仙都羽化之靈姿

! 매미 우는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 덕은 현자를 닮았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깨끗이 하여 君子,達人의 고귀한 행실의 자품(資稟)을 갖추었고

자기 허물을 벗어 신선이 사는 곳으로 날아오르는 신령한 자태를 가지고 있다.

候時而來 順陰陽之數 應節為變 審藏用之機 有目斯開 不以道昏而昧其視 有翼自薄 不以俗厚而易其真

때를 기다렸다 나타나 음양의 법칙을 따르고  계절에 맞춰 변화해 출처의 기회를 잘 살핀다.

눈은 항상 뜨고 있어서 세상의 도()가 어둡다고 하여 보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날개는 저절로 얇아서 세상 풍속이 후하다고 하여 그 참됨을 바꾸지 않는다.

吟喬樹之微風 韻資天縱 飲高秋之墜露 清畏人知 僕失路艱虞 遭時徽纆

높은 나무에서 미풍을 맞아 읊조리니 소리는 하늘이 준 훌륭한 품성을 바탕으로 하고,

높은 가을 하늘에서 내린 이슬을 마시니 자신의 맑음을 남들이 알까 두려워한다.

나는 길을 잃고 어려움과 근심 속에 있다가 감금되는 때를 만나게 되었다.

不哀傷而自怨 未搖落而先衰 聞蟪蛄之流聲 悟平反之已奏

슬퍼하고 가슴아파하지는 않지만 스스로를 원망하니, 가을이 되기도 전에 먼저 쇠락한 꼴이었다.

처량하게 우는 가을 매미 소리를 듣자니 평번(平反)하라는 주의(奏議)가 올라간 것을 알겠으나

螳螂之抱怯危機之未安 感而綴詩 貽諸知己

매미를 잡아먹으려 하는 사마귀 그림자를 보니 위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 겁난다.

느낀 바가 있어 시를 지어 지기(知己)에게 준다.

庶情沿物應 哀弱羽之飄零 道寄人知 憫餘聲之寂寞 非謂文墨 取代幽憂云爾

정이란 사물에 따라 응하는 것이니 가냘픈 날개가 나부껴 떨어짐을 슬퍼해주길 바라며,

이 말을 남에게 부쳐 알리노니 남은 소리가 적막해지고 말았음을 가여워해 주기 바란다.

글 자랑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고 깊은 근심을 가져와 대신한 것이다.

 

西陸蟬聲唱

南冠客思侵

那堪玄鬢影

來對白頭吟

露重飛難進

風多響易沉

無人信高潔

誰爲表予心

 

가을 하늘에 매미 소리 울려

죄수는 낯선 곳에서 고향 생각 깊어지누나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검은 머리 매미가

흰머리에게 와 노래하는 것을

이슬 무거워 날아가기 어렵고

바람 많아 소리는 쉽게 가라앉는구나

아무도 고결함 믿어주지 않으니

그 누가 내 마음 드러내줄 

 

 이 시는 당() 고종(高宗) 의봉(儀鳳) 3(678) 낙빈왕이 38세 되던 무렵에 쓴 것이다. 시 속의 백두(白頭)라는 표현으로 보아 장년의 나이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낙빈왕은 장안의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누차 간언을 올렸다가 무측천(武則天)에게 밉보여 뇌물을 받았다는 무고를 입고 1년여 동안 옥에 갇히게 된다.

매미를 통해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노래하면서 울울히 맺힌 마음을 담고 있는 영물시(詠物詩)이다. 

옛사람들은 매미가 바람과 이슬을 먹고 살아 성품이 고결해 군자, 달인(達人)과 같은 고상한 정조(情操)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매미를 읊은 시가 적지 않은데, 이 시엔 매미에게 가지고 있었던 옛사람들의 이러한 이미지가 잘 투영되어 있다.

 

駱賓王(낙빈왕) : 640~684. ()는 관광(觀光)이고, 무주(婺州) 의조(義烏: 現 浙江省 義烏縣)인이다. 

고종(高宗) 말년(末年)에 무공(武功)을 세워 시어사(侍御使) 등을 역임했다. 무후(武后)가 정치를 농단(壟斷)하자 서경업(徐敬業)이 거병하였는데, 낙빈왕은 그의 속관(屬官)으로서 유명한 討武后檄(토무후격)을 썼다. 서경업(徐敬業)이 실패한 뒤 도망갔으나 이후의 종적(蹤迹)은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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