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2. 18:30ㆍ漢詩를 맛보다
絶句
江碧鳥逾白
山靑花欲然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
강물이 파라니 새가 더욱 희게 보이고
산이 푸르니 꽃빛이 불 붙는 듯하도다
올 봄이 보건대 또 지나가니
어느 날이 정말 고향에 돌아갈 해인고.
삼국지를 종결시킨 인물 가운데 하나인 두예의 먼 후손이며, 조부인 두심언도 시인이었지만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다. 과거도 억울하게 계속 낙방하여 방랑의 삶을 살았다. 게다가 성격도 강직하여 아첨을 싫어했기에 과거에 급제했어도 높은 벼슬을 차지하긴 어려웠다. 이런 성품 때문인지 두보는 백성들의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시로 써 고위층의 사치와 대비하고 부패한 사회상을 비판하는 시를 많이 지었다. 이 때문에 두보는 현실적이고 사회성이 높은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으며 당시 사회상을 거울과 같이 그려내어 사람들이 그를 ‘시사(詩史)’라고도 불렀다. 물론 두보의 시 중에 낭만주의적인 시도 꽤 많다.
이백과 달리 안사의 난이 그에게는 입신양명의 발판이 되었다.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의 행재소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라는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강직한 성격은 그대로라서 결국 지방관으로 좌천되었고, 그나마도 그 지역에 어마어마한 기근이 닥치면서 끼니도 못 구할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굶주리던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상관들에게 구호식량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분노하여 48세에 사직하고 처자와 함께 감숙성(甘肅省)을 거쳐 촉 땅의 청두에 정착해 성 밖에 완화초당(浣花草堂)을 세웠다. 잠시 친구였던 촉 절도사의 막료로 있기도 했다. 이후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내려가서 기주(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2년간 더 방랑하다가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동정호(洞庭湖)에서 58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