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29. 11:19ㆍ漢詩를 맛보다
送杜少府之任蜀州 ㅡ 王勃
城闕輔三秦
風煙望吳津
與君離別意
同是宦遊人
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
無爲在歧路
兒女共霑巾.
삼진이 둘러싸고 있는 장안 성궐에서
바람과 안개 아득한 오진을 바라보네
그대와 이별하는 이 마음
우린 다 같이 벼슬살이로 떠도는 사람이지
천하에 知己만 있다면야
하늘 끝에 있어도 이웃과 같으리니
헤어지는 갈림길에서
아녀자같이 눈물로 수건을 적시지 마시게나
왕발의 자는 자안(子安)으로, 강주 용문(絳州 龍門, 지금의 샨시성[山西省] 허진[河津]) 사람이다. 6세 때에 이미 문장을 지을 수 있었고, 9세 때에 안사고(顔師古)가 주를 단 『한서(漢書)』를 읽고 그중의 오류를 지적하여 『지하(指瑕)』 10권을 지었다. 용삭(龍朔) 원년 661년 12세 때에 신동으로 조정에 추천을 받았고, 인덕(麟德) 원년 664년 15세 때에 대책(對策)을 올려 조산랑(朝散郞)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황족 중에 패왕(沛王)이 특히 그의 재주를 흠모하여 왕부로 초청해서 편찬 사업을 맡기자 「평대초략(平臺鈔略)」 10편을 지었다. 당시 황족을 비롯한 상류 사회에는 투계 놀이가 성행하고 있었는데, 왕발은 「격영왕계문(檄英王雞文: 영왕의 투계놀이를 비판한다)」를 장난삼아 지었다.
그런데 후에 이 글을 읽은 고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관직에서 쫓겨나 강한(江漢)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후 그의 부친이 교지령(交趾令, 지금의 베트남 북부)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자, 상원(上元) 2년(675)에 그곳으로 부친을 찾아뵙기 위해 길을 떠났다. 11월에 남해(南海,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광저우[廣州])에 도착해서 바다를 건너다 물에 빠져 놀라 죽었다.그때의 나이 26세였다.
초당(初唐) 시기의 걸출한 시인으로 양형(楊炯)·노조린(盧照隣)·낙빈왕(駱賓王)과 함께 초당사걸(初唐四傑)로 불린다.
『왕자안집(王子安集)』16권이 전해지고 있다.
이 시는 벼슬살이를 위해 떠나는 친구를 전송하며 지은 것으로,
첫째 연에서는 경치를 묘사하며 왕발이 장안에서 촉으로 떠나려는 두소부를 전송하고 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후는 떠나는 친구를 안위하고 위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남조(南朝)의 유명한 문학가 강엄(江淹)은 「별부(別賦)」에서 여러 종류의 이별을 묘사했는데, 모두 사람이 정신을 잃은 정도로 슬픈 이별만을 언급했다.
고대의 대부분의 송별시는 모두 이처럼 슬프고 비통한 감정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왕발의 이 작품은 슬픔 감정을 씻어버리고, 의경(意境)을 넓혔으며 음조가 밝아 독특하고 뛰어난 격조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