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4. 14:10ㆍ나는 王이로다
李芳遠
재위 1400.11.13.-1418.8.8. (18년,상왕4년)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번과 방석중 막대아들 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 6명 (방우,방과,방의,방간,방원,방연)중 방원의 처남 민무구,무질.이숙번,조준, 하륜,이거이,박포등과 함께 정도전 일파의 음모를 미리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등을 처형하였다(제1차 왕자의 난)
- 1400년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다섯째 아들)과 이방간(넷째 아들),박포등이 세자 자리를 두고 싸웠다 (제2차 왕자의난)
-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왕이 된 태종은 어린 막내를 왕세자로 내세운 신덕왕후를 태조 사후 후궁으로 격하시켰고 공신을 비롯하여 왕실의 종친들마저 처형하는 등 후계자의 후환을 미리 제거하였다.
재세 1367.5.16.(공민왕16).- 1422.5.10.(세종4) (55세)
선조 李成桂, 신의왕후 韓氏중 다섯째
부인- 20명, 자- 29명(12남,17녀)
-원경왕후 민씨-4남4녀(양녕대군,효령대군,충선대군(세종),성년대군,정순,경정,경안,정선공주)
-명빈 김씨, 의빈 권씨-1녀, 정비 고씨, 효빈 김씨-1남, 신빈 신씨,소빈 노씨,선빈 안씨-2남2녀,숙의 최씨-1남, 덕숙옹주 이씨, 숙공궁주 김씨, 순혜옹주 장씨, 혜선옹주 홍씨. 서경옹주,신순궁주 이씨, 의정궁주 조씨, 혜순궁주 이씨 후궁 김씨-1녀, 후궁 이씨-4남, 후궁이씨 -1녀
-헌릉(쌍릉,헌인릉)
개혁과 혁명을 두고 노선 논쟁을 벌이던 친구 정몽주를 멋대로 때려죽인, 야망으로 뭉친 아들이었다.
1392년 7월 12일 공양왕이 폐위되고 닷새 뒤 이성계가 왕위를 계승했다. 한 달 뒤 아들의 야심을 경계하던 이성계는 막내 방석을 세자로 임명했다. 개국공신 명단에도 방원은 빼버렸다. 분기탱천한 이방원은 두 차례에 걸쳐 형제들을 싸그리 죽여버렸다.
이방원은 1400년 1월 수도 개경(2대 왕 정종이 한양에서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에서 넷째 형 이방간과 시가전을 벌인 끝에 왕이 되었다. 늙은 아비는 충격을 받고 고향 함흥으로 떠나버렸다. 양주 회암사와 함경도 안변 석왕사를 맴돌며 분을 삭였다.
태종은 사람을 보내 환궁을 청했다. 그때마다 "이성계는 화살을 날려 죽여버렸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고 그 이야기를 '함흥차사(咸興差使)'라 믿고 있다. 기록 어디에도 그 누구 하나 이성계의 손에 죽은 사람은 없으니, 낭설이요 전설이다
1402년 11월 5일 안변 부사 조사의(趙思義)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성계가 사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반역자는 삼족을 멸해야 마땅하거늘, 진압 후 벌은 관대했다. 실록에는 적혀 있다. "상이 말했다. '태상(이성계)의 명을 어길 수 없었을 것이니 어찌 법대로만 처리하겠는가'라고(세종실록)." 반란이 확산되자 태종이 직접 참전했다. 아들의 참전 소식에 이성계가 환궁을 결정했다. 12월 8일 이성계가 수도로 돌아왔다. 예순일곱 살. 이빨도 발톱도 없는 늙은 호랑이가 꼬리를 내렸다.
개국 작업을 도운 사람 가운데 무학대사가 있다. 한양으로 도읍지를 결정하는 데에도 그가 있었고 함흥에서 환궁을 유도한 사람도 그였다.
의정부 옆 양주 땅에는 회암사라는 절이 있었다. 이성계는 고향 함흥을 제외하고는 말년에 주로 회암사에서 무학과 함께 머물렀다. 자신이 묵을 궁실도 짓고 살았다.
고려 말 학자 목은 이색이 "아름답고 화려하기가 동국 제일"이라고 놀라워했던 그 절이 지금은 터만 남았다. 불교를 비난하는 유학자들이 1566~1595년 불태워 폐사됐다는 기록이 있다. 터만 남았지만, 그 규모는 입이 벌어질 정도다. 규모에 관한 한 '유적'이라고 세계에 보여줄 만한 대표적인 흔적이다. 절터 위 계곡 끝에 있는 새로운 회암사 언덕에는 무학대사 부도가 서 있다. 몸통에 새겨진 용은 발톱이 네 개가 아니라 다섯 개다. 황제라는 뜻이다. 장식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으니, 킹메이커의 유택으로 딱 맞다.
카리스마 가득했던 무장(武將) 이성계는 구리시 동구릉에 묻혀 있다. 건원릉이다.
흔한 잔디 대신 무성한 억새풀로 뗏장을 입혀놓았다. 다음 달 5일 이 억새를 벌초하고 고유제를 지낸다.
의정부시 호원동 회룡골 입구 길거리에는 작은 표석이 서 있다. 내용은 이렇다.
'이성계가 마침내 한양 환궁 길에 올랐다. 이때 태종이 이곳까지 친히 나와서 맞이했는데 그 상봉지가 전좌마을이 되었고 이곳에서 대신들과 정사를 논했다고 하여 의정부라는 지명을 얻었다.'
일단 한양이 틀렸다. 1402년 당시 조선 수도는 한양에서 개경으로 환도된 상태였다. 함흥에서 개경으로 가려면, 노망에 걸리지 않은 한 양주 땅까지 남하했다가 북상할 이유가 없다
실록에는 '12월 8일 금교역(金郊驛)에 나가서 태상왕을 맞이했다(태종실록 1402년 12월 8일)'고 기록돼 있다. 금교역은 황해도 금천에 있다. '대신들과 정사를 논했다 하여 의정부라는 지명을 얻었다'는 말도 따라서 틀렸다. 3년 뒤인 1405년 10월 20일 태종이 창덕궁에 들어가면서 한양 환도(還都)가 공식적으로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