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2022. 4. 5. 10:43나는 王이로다

이도(李祹)

재위 1418.8.10.-1450.2.17 (32)

1418년 6월 3일 조선 3대 국왕 태종은 세자 이제(李禔)를 폐하고 막내아들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둘째 효령대군도 세자 후보였으나 '술이 약해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탈락했다.양녕은 다른 사람 첩인 어리(於里)를 강제로 자기 첩으로 빼앗아 임신을 시키는가 하면(1418년 3월 6일 '태종실록'), "아버지는 첩을 마음대로 두고 아들은 못하게 하니,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고 반협박조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던 권력자였다.(1418년 5월 30일 '태종실록') 그 외에 구차하고 숱한 이유로 태종은 양녕을 경기도 광주로 쫓아버렸다."내가 죽은 뒤에도 양녕은 서울에 내왕하지 못한다(自予千歲之後 禔不得往來于京: 자여천세지후 제부득왕래우경)."(1427년 5월 8일 '세종실록')

재세 1397.8.10.(태종6).- 1450.2.17.(세종32)(22세 즉위, 왕세자 52, 53)

부인- 10, - 22(18,4) -소헌왕후 심씨-82(문종,수양대군(세조),안평대군,임영대군,광평대군,금성대군,평원대군,영응 대군,정소,정의공주)

-영빈 강씨-1, 신비 김씨-6, 혜빈 양씨-3, 귀인 박씨, 귀인 최씨, 숙용 홍씨, 숙원 이씨-1, 상침 송씨-1, 사기 차씨

-영릉(합장릉,영릉)

친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냉정한 권력자 태종이지만, 아들 건강에 관한 한 그저 아버지였다.

왕위를 물려받은 셋째아들 세종이 육식만 밝히는 데다 운동도 하지 않는 책벌레이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왕이 되었으니 직접 말은 하지 못하고 신하들을 불러 따로 조언을 한다. '내 아들은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습니다. 절대로 채식은 안 합니다.' '내 아들은 노는 걸 좋아하지 않아 뚱뚱해졌으니 운동을 시켜야 합니다(主上不喜游田 然肌膚肥重 須當以時出遊節宣).' 그리하여 성군(聖君) 세종대왕은 왕위 등극 두 달 만에 아버지를 따라 강제로 사냥과 군사훈련에 참가해야 했다.

임금님 수라상과 건강은 이후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가뭄에 절식하겠다는 세종에게 의사들이 이렇게도 말한다. "'내 아들은 고기나 생선 없이 찬을 줄여 내면 먹지 않는다'는 태종 임금 말씀이 귓가에 쟁쟁합니다. 어찌 이러십니까." 세종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루에 네 끼를 먹는데, 이걸로 족하다." 채식 또한 편식을 했다.

성현(1439~ 1504)이 쓴 용재총화에 따르면 '지금까지 궁궐에 가득 찬 앵두는 문종 임금이 손수 심은 것이다.' 왕세자 시절 문종이 후원에 손수 심은 앵두를 아버지 세종에 올리니, "바깥에서 올린 것이 어찌 세자(世子)의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라며 기뻐하였다.(문종실록)

53년 인생, 재위 32년 동안 세종은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행했다. 편식을 줄이고 공부 또한 조금만 게을렀다면 환갑 지나고 고희 지나 더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태종이 '장엄하고 엄중한(莊重)' 사람이라 평했던 아들이었지만, 건강을 돌볼 줄 몰랐다.

최고 권력자가 건강을 팽개치고 국사를 돌보는데, 그 신하들이 게으를 수가 없다.

1427년 음력 10월 7일 부모상을 당해 3년 동안 휴직계를 낸 정승 황희를 100일 만에 업무에 복귀시켰다. 황희는 64세였다. 11월 27일 세종은 세 번 복직 명령 철회를 신청한 황희를 기어이 복직시키며 직접 불러 고기를 먹였다. 황희는 결국 "어찌 감히 따르지 않으오리까" 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자리에서 나아가 울면서 고기를 받아먹었다.

세종은 "앞으로 국정에 관계되는 이가 아니면 상중에는 복직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5년 뒤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세종은 "갑자기 물러가 한가롭게 지내기를 청하는가"라며 거부했다.(세종실록)

7년 뒤 1439년 황희가 도승지 김돈을 시켜서 다시 사직의 뜻을 올렸다. 김돈이 "황희가 아래로 피를 흘리고 귀와 눈이 어둡다고 한다"고 넌지시 보고했다. 세종은 "진짜 그러한지 직접 봤나"고 따져 물었다. "귀는 어두우나, 정신은 혼미하지 않은 듯…"이라 우물쭈물하는 김돈에게 세종은 황희의 재택근무를 명했다. 황희 나이 76세였다. 1449년 5월 가뭄이 들었다. 황희 나이 여든여섯이다. 황희가 말했다. "나이가 구십에 가까운데 공이 없이 월급만 받으니 하늘이 노한 것이오. 그러니 사직서를 받아주시길." 이 또한 거부됐다.

세종은 그해 10월에야 은퇴를 허가했다. 이듬해 세종이 죽었다. 2년 뒤 황희가 죽었다.

 

1433년 음력 9월 16일이다. "장영실이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었는데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

자격궁루는 물시계다. 기존에 쓰던 물시계가 오차가 많아 세종 명으로 새로 만든 시계다. 조선의 국가표준시(國家標準時)를 규정하는 어마어마한 시계다. 이 시계가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세종은 자기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만, 이 사람이 아니라면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까지 장영실 보직은 정5품 사직이었다. 사직은 특별한 보직 없이 월급을 지급하는 무임소직이다. 그 이전 보직은 상의원 별좌였다. 상의원은 왕실 의복을 다루는 부서다. 별좌는 정5품인데, 무급(無給)이다. 이제 세종이 월급을 받는 정4품 호군으로 승진시키겠다는 것이다. 왕이 스스로 말하기도 했지만, 장영실은 그런 품계에 오를 수 없는 '기생의 아들', 천민이었다. 하지만 왕명이 추상같고 그 업무 성과에 왕의 가르침이 개입돼 있으니 두 정승은 꼼짝없이 받아들였다.(1433년 세종 15년 9월 16일 실록) 5년 뒤 장영실은 종3품 대호군까지 승진했다.

그런데 1442년 음력 3월 16일 장영실은 곤장 80대를 얻어맞고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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