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7. 11:16ㆍ나는 王이로다
홍위(弘喡)
재위 1452.5.18. -1455.6.11. (3년)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영풍군, 정종 등은 단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문종의 후궁인 숙빈 홍씨 등은 정보를 훈신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 경쟁은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453년 음력 10월, 계유정난을 불러왔다
1457년 9월 금성대군은 배소인 순흥에서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운다. 금성대군,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단종도 같이 죽음을 내렸다
재세 1441.7.23.- 1457.10.21.(왕 즉위 12세, 16세)
부인- 3명
-정순왕후 송씨(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송씨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숙의 김씨, 숙의 권씨
-장릉(단릉), 사릉(단릉, 사릉(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사모(思慕)하였다고 붙여졌다)
수양대군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한양에서 머나먼 영월 땅으로 유배당했다.
영월 초입 고개를 넘을 때 소나기가 내렸다 하여 소나기재다. 재를 넘어 그가 갇힌 곳이 청령포다.
서강과 동강은 석질이 무른 석회암지대를 흐르며 수많은 물돌이동을 만들어놓았다. 청령포도 그 가운데 하나다.
삼 면은 물, 한 면은 절벽이다. 천연 감옥이다.
노산군으로 전락한 옛 왕이 머물던 집터, 그가 살던 때부터 서 있는 600년 된 관음송과 그가 쌓았다는 망향탑도 있다.
친족, 처족, 외척 삼족이 멸문당할 각오를 하고서, 영월 사람 엄흥도가 사약 받고 죽은 그의 시신을 수습했다.
엄동설한 야밤에 지게에 시신을 지고 봉분도 없이 선산에 묻었다. 훗날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 자리가 왕릉이 됐다.
장릉이다. 유일한 경기지역 바깥 왕릉이다.
왕릉 초입길에 있는 가녀린 소나무를 눈여겨본다. 헤어진 왕비 정순왕후가 묻힌 남양주 사릉에서 가져온 소나무다. 정령송(精靈松)이라 한다.
단종 애사(哀史)는 청령포와 장릉에서 끝나지 않는다.
노산군으로 강봉됐던 단종은 사약을 받은 지 224년 만인 1681년(숙종 7년)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7년 뒤 왕으로 복위됐다.
숙종은 선대왕에 대해 소상히 물은 뒤 시를 한 수 내려보냈다. 불 타 없어진 이 시 현판을 명필이던 영조가 다시 쓰고 정조가 또 보태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