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2022. 3. 29. 10:25나는 王이로다

李成桂 (李旦)

재위 1392.7.17. - 1398.9.5.(57세 즉위, 6)

재세 1335.10.11.(충숙왕8)- 1408.5.24.(태종8)(74)

선조 李安社-李行里-李椿-李子春

부인-8, -13(8,5)

- 신의왕후 한씨 - 62(진안대군(방우),영안대군(방과,정종),익안대군(방의),희안대군(방간),정안군(방원),덕안대군(방연),경신공주,경선공주)

- 신덕왕후 강씨 - 21(무안대군(방번),의안대군(방석),경순공주)

- 성비 원씨, 정경궁주 유씨, 화의옹주 김씨(관기출신)-1, 찬덕 주씨-1, 궁인 이씨, 巫俠兒

- 건원릉(동구릉),제릉(북한,신의왕후 한씨),정릉(정릉,신덕왕후 강씨) - 태종은 계모 신덕왕후가 이복동생 의안대군등을 세자로 세운것에 불반을 품고 정릉, 정각을 허물고 분풀이를 한다.

경기도 구리에는 조선 왕 일곱 명이 잠들어 있다. 동구릉(東九陵)이다.

잔디 대신 억새 뗏장을 입혔다. 섬뜩할 정도로 위풍당당하다. 그 아래에 신도비가 있다.

이성계가 죽고 1년 뒤인 1409년 태종 9년 윤4월 13일에 세웠다.

앞면에는 이성계 일대기가, 뒷면에는 함께 조선을 만든 혁명 동지, 개국공신들 이름이 적혀 있다. 누가 뭐래도 일등 개국공신은 정도전(鄭道傳)이다

1384년 정도전은 함경도에서 지휘관으로 근무하던 이성계를 찾아갔다. 군령이 제대로 선 그 군사를 보고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라며 시 한 수를 읊었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蒼茫歲月一株松

푸른 산 몇 만 겹 속에 자랐구나, 生長靑山幾萬重

(1398년 태조 7년 8월 26일 '태조실록', '함영 소나무를 짓다·題咸營松樹') 두 사람은 혁명 동지가 되었고,

이윽고 8년 뒤 부패한 고려 정권을 타도했다.

정도전은 일등 개국공신으로 서훈됐다.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집필했다.

조선의 통치 시스템과 철학이 다 들어 있다. 민본(民本)이다. '임금은 높다면 높고 귀하다면 귀하다. 그러나 만민은 지극히 많다.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마 크게 염려할 일이 생기게 되리라.(人君之位尊則尊矣貴則貴矣 然萬民至衆也一有不得其心則蓋有大可慮者存焉)'(삼봉집, '조선경국전', '보위를 바르게 하다·正寶位') 리고 부패 원인 제거 작업에 들어갔다.

첫째가 사병(私兵) 혁파였다. 고려 말 권문귀족들의 기초가 된 군사력을 회수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에 결사반대한 세력이 이성계의 아들이자 개국공신 이방원이었다. 게다가 태조 이성계가 혁명 동지인 아들 방원을 내치고 둘째 부인의 어린 아들을 세자로 삼기까지 했다. 이방원은 군사력도 잃고 권력과도 멀어졌다. 위기를 느낀 이방원이 군사력과 무력을 회수하기 위해 벌인 군사행동이 바로 '1차 왕자의 난'이다.

1398년 8월 26일 저녁, 경복궁 서쪽 이방원 집에서 아내 민씨가 비축해둔 무기로 무장한 보병 9명과 기병 10명이 송현동으로 출발했다. 심복 이숙번(李叔蕃)의 철기(鐵騎)부대가 이미 무기고를 점령하고 광화문에서 남산까지 대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성현, '용재총화·慵齋叢話') 이경(二更·밤 9시~11시) 무렵 이방원 군은 송현동에 있는 남은의 첩 집을 포위했다. 정도전은 등불을 밝히며 남은과 대화 중이었다. 정도전은 옆집으로 도망갔다가 체포됐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살려주소서(活之)"라고 애원했고,

이방원은 "어떻게 악한 짓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느냐"며 참수를 명했다.(1398년 태조 7년 8월 26일 '태조실록')

이방원은 "정도전이 어린 서자(庶子)를 세자로 세우려고 하여 나의 형제들을 제거하고자 하므로 내가 선수(先手)를 썼다"고 했다. 비굴한 그 최후가 '삼봉집'에는 이렇게 묘사돼 있다. 최후의 순간 그가 썼다는 시(詩), '자조(自嘲)'다.

힘 다해 마음 다스려 고민했고, 操存省察兩加功

책 속 성현 저버리지 않았노라, 不負聖賢黃卷中 

삼십 년 이래에 근고를 다한 업이, 三十年來勤苦業 

송정에서 한 번 취해 허사가 되다니, 松亭一醉竟成空

그가 죽고 467년이 지난 1865년 양력 9월 10일, 대왕대비가 경복궁 중건을 기념해 정도전을 사면했다.

'정도전이 전각 이름을 정하고 송축한 글을 생각해보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永念 鄭道傳定名頌祝之辭 不覺曠感).'(1865년 9월 10일 고종 2년 '고종실록') 건물 작명가로서 명예를 회복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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