飮中八仙歌

2022. 7. 7. 20:26漢詩를 맛보다

飮中八仙歌

知章騎馬似乘船 眼花落井水底眠

汝陽三斗始朝天 道逢麯車口流涎 恨不移封向酒泉

左相日興費萬錢 飮如長鯨吸百川 銜杯落聖秤避賢

宗之瀟灑美少年 擧觴白眼望靑天 皎如玉樹臨風前

蘇晋長齊繡佛前 醉中往往愛逃禪

李伯一斗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

張旭三杯草聖傳 脫帽露頂王公前 揮毫落紙如雲煙

樵遂五斗方草然 高談雄辯驚四筵.

 

하지장은 말을 타면 배를 탄 둣하니 눈이 아른거려 우물에 떨어져서 밑바닥에서 잠드네

여양(이진)왕은 세말은 마셔야 비로소 조정에 나아가고 길에서 누룩수레만 만나도 군침을 흘리며

酒泉으로 封地를 옮겨지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네

좌상(이적지)은 하루 유흥비로 만전이나 탕진하고 큰 고래가 강물 들이키듯 술을 마시네

맑은 술이나 마셨지 막걸리 따윈 거들떠 보지도 않지

종지(최종지)는 깔끔한 미남인데 잔 들고 흰 눈으로 푸른하늘을 쳐다보면

옥으로 다듬은 나무가 바람앞에 흔들리는 듯하지

소진은 수놓은 부처앞에서 오랫동안 정진하다가도 취하면 때때로 참선를 파하기를 즐겨하곤 하네

이백은 술 한말에 詩 백편을 쓰는데 정안 저자 술집에서 골아 떨어지기 일쑤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자칭 "신은 술 마시는 신선입니다 "하지

장욱은 석 잔쯤 마셔야 초서를 쓰는데  갓 벗고 왕공앞에서도 정수리를 드러내 보였고 종이위에 일필휘지 구름 같고 연기 같네

초수는 다섯 말은 마셔야 신명이 나는데 고상한 이야기와 빼어난 말솜씨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네

賀知章 (659~744) 은 자가 계진이고, 스스로 사명광객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마음이 호탕하고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고 술을 좋아했으며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집현전 학사 및 비서감을 지냈으며, 만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도사가 되었다고 한다. 李白이 처음 장안에 왔을 때 그를 귀양 온 신선이라고 부르며 현종에게 천거하였으며, 술에 취해 말을 타고 가다가 우물에 빠져 물속에서 그대로 잠을 잤다는 고사를 만들어 냈다.

李璡 (?~ 750)은 현종의 조카로 여양 군왕에 봉해진 인물인데, 하지장 무리의 친구 중 하나다. 항상 술 세말을 마시고 난 후에야 천자를 알현하러 출근을 하였는데, 길에서 누룩 수레를 만나면 다시 술 생각이 간절하여 침을 흘리며 감숙성 주천군(酒泉郡)으로 옮겨 주기를 바랐다고 한다. 주천군은 술맛 나는 샘이 솟아나는 지역으로서, 한나라 때 곽거병이 한무제가 하사한 술을 주천 샘에 이 부어서 부하들과 나눠마셨다는 고사가 있다.

李適之 (?~746)는 어사 대부와 좌승상 등의 고위직을 지낸 인물인데, 성품이 강직하고 손님 맞이하기를 좋아하여 한 말 술을 마시고도 전혀 취하지 않는 주량으로 밤마다 술자리를 열고 낮에는 태연히 공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이적지는 만년에 간신 이림보의 간계에 걸려 좌승상에서 파직되어 시골 태수로 좌천된 후 음독자살했다.

崔宗之 는 이부상서 최일용의 아들로 시어사 등을 지내다 금릉으로 좌천되었는데, 시문에 뛰어나서 이백과 친하게 되어 매일 술을 마시며 보냈다고 한다. 그는 옥수처럼 풍채가 뛰어나서 무엇이 못마땅하여 술잔을 들고 흰 눈자위로 푸른 하늘을 흘겨보는 모습은 옥수가 바람 앞에 임해 있는 듯 한 점 티끌 도 없는 아름다운 풍채였다고 한다.

蘇晉 (676~ 734) 은 젊어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이부시랑이 되어서 황제의 조서를 담당했다. 그는 불교 신자였지만 술을 좋아해서 종종 만취하여 계율을 어겼으나, 술 친구들과 종종 어울리며 교유했다.

李白 은 하지장의 추천으로 공봉한림으로 임명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권신들의 참훼를 받아 겨우 1년 만에 장안을 떠나야 했다. 그는 타고난 술꾼으로 틈만 나면 벗들과 어울려 장안의 술집에서 대취하곤 했으며, 현종이 양귀비와 함게 백련지에서 배를 띄우고 이백에게 악장 짓기를 지시하였으나, 술에 취해 배에 오르지도 못하고 '저는 술 취한 신선입니다'라고 황제에게 아룄다고 한다.

張旭 은 좌솔부장사를 지냈는데, 특히 초서에 뛰어나 초서의 성인이라 불렸다. 당시 그의 글씨는 이백의 시, 배민의 검무와 더불어 '장안의 삼절'로 일컬어졌다. 술에 취하면 왕공들 앞에서 무례하게 두건을 벗고 정수리를 드러낸 채 글씨를 휘갈기곤 했는데, 종종 광란이 극에 달하면 붓 대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먹을 찍어 글씨를 썼다고 한다.

焦遂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서 평소에는 어눌하나 술에 취하면 고담과 웅변으로 사방 술자리의 참석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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