宣祖

2022. 9. 18. 10:22나는 王이로다

중종의 서손, 명종의 서이복조카, 덕흥대원군(하원군,하릉군,하성군)의 서자이었다

李鈞())→연(昖)

재위 1567.7.3.-1608.2.1 )

재세 1552.11.11.-1608.2.1.(56)

부인- 10, -25(14,11)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51세와 19세 왕비)-11(영창대군(55세 득남),정명공주)

-공빈김씨-2(임해군(성격 포악),광해군)

-인빈김씨-45(의안군,시성군,정원대원군(원종)(능양군,능원군,능창군),의창군,정신,정헤,

정숙,정안,정휘공주)

-순빈김씨-1, 정빈민씨-23,정빈홍씨-11, 온빈한씨-31, 귀인정씨, 숙의정씨

-목릉(동원이강릉,목릉),성묘(공빈김씨)순강원(인빅김씨)

 

1419년 조선 4대 왕 세종이 왜구 본거지 대마도를 정벌했다.

1449년에는 두만강 유역 여진족을 소탕하고 4군 6진을 설치했다.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무리를 단칼에 처단한 이 나라에 143년 뒤 전쟁이 터졌다. 임진왜란이다.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된 사절이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다치바나는 기행(奇行)을 남겼다. 상주에 도착해 목사 송응형이 기생 춤과 음악으로 접대하자 이리 말했다.

"전쟁 속에 산 나야 그렇다고 쳐도, 노래와 기생 속에 아무 걱정 없이 지낸 당신 머리털이 희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다치바나가 서울에 도착하니 예조판서가 잔치를 베풀었다. 술잔이 돌고 다치바나가 후추 알들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기생과 악공들이 서로 다투며 줍느라 대혼란이 벌어졌다.

다치바나가 통역관에게 탄식했다. "너희 나라는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다. 망하지 않기를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류성룡·징비록)." 

대마도 정벌과 6진 건설 이후 100여 년 사이 망가진 스산한 조선을. 다치바나가 보고 들은 바는 고스란히 일본 정부에 보고됐다. 1586년, 임진왜란 발발 6년 전이다.

1592년 음력 4월 14일 대마도를 떠난 일본군 본진이 부산에 상륙했다.

이튿날 동래부사 송상현은 분전 끝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서 죽음을 맞았다.

평화로운 시절 부산을 자주 찾아 안면이 있던 일본 장수 다이라(平調益)가 옷깃을 끌며 피하라고 눈치를 줬다. 송상현은 거부했다. 그가 죽은 뒤 다이라는 탄식하며 시신을 관(棺)에 넣어 성 밖에 묻고 푯말을 세웠다.

다이라의 상관인 대마도주 소요시토시(宗義智)는 송상현을 죽인 병사들 목을 베 예를 올렸다. 동래가 함락되고 문경이 함락되고 충주에서 신립이 8만 병사와 함께 죽었다.

4월 28일 최고 지도자 선조가 회의를 열었다.

선조가 발의한 안건은 한양 포기 여부였다. 수도를 포기한다고? 영의정 이산해는 그저 울기만 하다가 "옛날에도 피란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선조실록). 이틀 뒤 폭우 속에 울부짖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선조 일행이 임진강을 건넜다.

5월 초하루 선조가 강 건너 동파역에서 야전회의를 주재했다. 역시 안건은 피란 여부였다.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지도자 본심이 드러났다.

'내부(內附)'는 명나라 영토 요동으로 들어가 귀순한다는 뜻이다. 수도를 떠난 게 엊그젠데, 나라를 떠난다고?

이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승지 이항복은 찬성했다. 좌의정 류성룡은 거칠게 반대했다.

요동 망명은 무산됐다. 도주하는 내내 선조는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 손에 죽을 수는 없다"며 아쉬워했다.

음력 5월 7일 피란을 거듭하던 조선 정부 지도부가 평양에 도착했다. 그 사이 한강 방어선은 도원수로 임명된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이 맡았다. 한양 수비는 우의정 이양원이 담당했다. 바닷물처럼 밀려든 일본군 앞에서 도원수 김명원은 퇴각을 결정했다. 결사 항전을 외치던 부원수 신각 부대와 이양원의 한양수비대도 결국 흩어졌다. 경기도 양주에서 이들은 함경 남병사 이혼이 이끄는 병력과 극적으로 만났다.

5월 16일 세 지휘관이 이끄는 조선 육군과 일본군 선발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양주와 파주를 잇는 해유령 고개였다. 일본군 70여 명 전원 사살. 임진왜란 육전(陸戰) 첫 승리였다.

사흘 뒤 승전보를 평양으로 보내고 기다리던 이들 앞에 조정에서 보낸 선전관이 도착했다. 선전관이 어명을 읽었다. "비겁한 장수 신각의 목을 쳐라." 부대원들 앞에서 신각이 목 잘려 죽었다. 달아난 도원수 김명원이 "무단 이탈한 신각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보고한 탓이다. 선전관이 남쪽으로 출발한 직후 신각이 올린 전승 보고서와 일본군 머리 70개가 평양에 도착했다. 또 다른 선전관을 급파했으나, 허공으로 달아난 명예와 흩뿌린 피, 땅에 떨어진 군사들 사기는 회복할 수 없었다.

그즈음 함경도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주모자는 국경인(鞠景仁). 가담자는 함경도 주민들이었다. 전주 사람 국경인은 나라에 죄를 짓고 회령으로 쫓겨난 하급 벼슬아치였다. 7월 1일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회령에 접근하자 이들은 선조의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을 '모두 결박하고 마치 기물(器物)을 쌓아놓듯 한 칸 방에 가둔 뒤' 일본군에 넘기고 항복해버렸다(선조실록). 훗날 의병부대에 의해 타도될 때까지 이들은 회령 일대에서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주민들이 왕자들이 가는 길마다 일본군 보라고 왕자들의 행방을 적어 붙이고 다녔다"는 것이다.

두 왕자가 함경도로 간 목적은 근왕병 모집과 주민 위로였다.

그런데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들의 좋은 말과 보화를 보면 기필코 약탈해갔다. 적을 앞에 두고 백성들을 흩어지게 할 생각밖에 없었다(見人善馬寶貨則必掠之望賊思散之民).'(이호민·오봉집(五峯集)) '민간을 겁박하고 수령을 핍박해 인심을 크게 잃었다(侵撓民間逼責守令大失人心).'(권용중·용사일록(龍蛇日錄)) 엄혹한 전란 속에 갑질을 해댄 것이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어떤 왕자인가. 임해군은 '사람 죽이기를 초개같이 하다가 벌을 받으니 도성 안 백성들이 춤을 췄다.' 순화군은 '눈먼 여자의 이 열 개를 쇠뭉치로 깨고 집게로 잡아 빼 결국 죽게 하기도 했다(선조실록).' 전쟁 후에도 악행은 끝이 없었다. 아비 선조는 이들을 벌하라는 상소에 대개 귀를 닫거나 처벌을 불허하곤 했다.

각각 스물한 살, 열세 살에 불과한 이 무뢰한들에게 선조는 군사 모병과 주민 위무 책임을 맡긴 것이다.

반란은 자연스러웠다. 인질이 된 두 왕자는 오랜 기간 휴전 협상에 큰 걸림돌이 됐다. 휴전협상에 임했던 명나라 사신 심유경에게 임해군은 이렇게 말했다. "나만 풀어주면 한강 이남 땅은 마음대로 나눠 가지라(징비록)."

반란군을 제압하고 함경도를 수복한 전투가 북관대첩이다. 총사령관은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였다.

정6품이니 그리 높은 직급은 아니었다. 주력부대는 의병이었다. 일본군과 국경인의 행패를 쓰라리게 겪은 주민들도 반란군에서 대거 이탈했다. 음력 9월에 거병한 정문부 부대는 10월 총공세에 들어가 반란군 지도부를 죽이고 적지를 속속 회복했다. 두 왕자를 적에게 넘긴 반란군 토벌이 첫 번째 목적이었으니, 참으로 대의명분에 충실한 전투였다. 실지 회복 또한 목적이었으니 이 또한 달성됐다. 그런데―.

'의병장 정문부의 전공(戰功)을 순찰사 윤탁연이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정문부의 부하가 왜군 목을 가지고 함경남도를 지나면 모두 빼앗아 자기 수하 군사들에게 주었다. 윤탁연이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에게 옷과 월동 장비를 주었으므로 그들이 조정에 돌아와서는 모두가 윤탁연을 옹호하고 정문부의 공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결국 종성 부사 정현룡이 함북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정문부는 급이 낮은 길주 부사에 임명됐다.

참고로 사관 박동량이 남긴 사초(史草) '기재사초'는 정현룡을 이렇게 기록했다. "종성부사 정현룡은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고 학대하면 원수다.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至有撫我則后虐我則讎 何使非臣何事非君)'라는 글을 쓰고 왜군에 항복하려다 글을 집어던지고 도주하였다."

6월 5일 평안도 안주에 도착한 선조가 명나라 장수 유원외를 접견했다.

유원외가 말했다.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었는데 근래에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이다(선조실록)." 해유령전투에서 신각과 함께 싸우다 참살을 목격한 함경 남병사 이혼은 임지로 복귀해 반란군과 전투 도중 전사했다.

역시 해유령 전투에 참전했던 우의정 이양원은 의주에 도착한 선조가 요동으로 넘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8일 동안 단식하다 경기도 이천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정문부는 전쟁 후 1624년 역모 혐의로 체포돼 고문 끝에 옥사했다.

"벼슬할 생각은 하지 말고, 경상도 진주에 내려가서 숨어 살아라"라고 유언을 남겼다. 1665년 누명이 풀리고 1709년 북관대첩을 기념하는 북관대첩비가 길주에 건립됐다. 비석은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가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세워뒀다.

2005년 10월 20일 한국으로 반환된 비석은 이듬해 3월 23일 원건립지인 북한 김책시로 돌아갔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과 독립기념관,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정문부 묘소에 복제비가 서 있다. 해유령에는 1977년 전첩기념비와 사당이 섰다. 비석에는 참수된 신각을 추도하고 거짓 보고를 한 김명원을 비난하는 글이 적혀 있다.

 

군인 이순신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서기 1597년 음력 2월 26일 조선해군 총사령관 이순신은 가덕도로 향하던 도중 사령부인 삼도수군통제영으로 귀대했다. 통제영은 경남 통영 한산도에 있다.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체포조가 대기 중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별 넷, 대장(大將)이 계급장을 떼이고 서울로 압송됐다. 체포조 옆에는 후임 사령관이 대기 중이었다. 후임은 원균이다. 압송되기 전 이순신은 원균에게 군비(軍備) 일체를 인계했다. 한산도 병영 내에는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이 있었고 각 군함에는 총통 300자루가 탑재돼 있었다.(이상 '이충무공 행록')

다섯 달 뒤 이 병력과 군수품은 거제도 옆 칠천량 바다에 몽땅 수장됐다.

'선전관 이순일 말이 "명나라에서 공에게 은청금자광록대부(銀靑金紫光祿大夫) 작위를 내려준다는 소문이 있더라" 하였으나 필시 헛소문일 것이다.'(난중일기 초고(草稿) 1593년 계사년 5월 5일)

이순신이 연전연승을 거두자 그가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소문이 이순신 본인에게까지 들어왔다. 전라좌수사로 전쟁에 임한 지 1년, 그리고 그가 전라, 충청, 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기 석 달 전이다. 광록대부는 명나라 종1품이다. 그 아래로 금자광록대부와 은청광록대부가 있으니 소문 자체가 낭설이다. 종1품이었던 소문 속 벼슬은 전쟁이 진행되면서 정1품까지 올라갔다. 소문은 중앙정부에까지 들어갔다. '순신의 직품은 정1품이었으니 자연 법전(法典)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겠으나'(선조실록 1598년 11월 30일) 1793년 정조가 내린 영의정 추증 교서도 '유명수군도독(有明水軍都督)'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중국 어느 사서에도 이순신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정1품 도독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최근 그가 황제로부터 받았다는 여덟 가지 팔사품(八賜品, 보물 440호)이 황제가 아니라 조명연합군 사령관 진린 선물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장경희, '통영 충렬사 팔사품 연구', 2014) 문제는 사실 여부가 아니다. 그 소문을 선조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14대 국왕 이연은 유능한 인물이었다. 주위 만류를 뿌리치고 정읍 현감 이순신을 7계급 특진시켜 전라좌수사로 임명한 지도자였다. 개전 초 전황이 가망 없음을 알고 요동으로 망명 갈 꿈을 꾼, 판단이 빠른 사람이었다. 조총(鳥銃)을 스스로 역설계해 조립도 하고, 각료들과 함께 전황을 토론하는 전술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기적이었다.

전쟁이 터진 지 14일 만에 중국으로 가려는 선조에게 관료들은 "왕세자부터 결정하라"고 주장했다.

왕이 떠나면 민심을 진정시킬 수 없다고 했다.(선조실록 1592년 4월 28일) 이틀 뒤 선조는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하고 의주로 달아났다. 백성들은 경복궁을 불태워 화를 달랬다.

이후 전쟁 준비와 백성 위무는 열일곱 먹은 광해군이 책임졌다. 육지에서는 그가 팽개친 백성이 의병을 일으켰고, 바다는 그가 낙점했던 탁월한 장수 이순신이 구했다.

백성으로부터 조롱과 비난을 받은 지도자는 그 분노를 군사에게 돌렸다.

의병장들과 이순신은 나라를 버린 지도자에게 분노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의병장 김덕령은 전쟁 도중 반란죄로 처형됐다.

전후 논공행상에서 퇴직 관리 출신을 제외하고는 의병장들은 한 명도 공신록에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 이순신이 황제국 명나라로부터 정1품 벼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순신 본인은 우직한 군인이었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뛰어넘어서(寵榮超躐) 분에 넘쳤다.'(난중일기 1595년 5월 29일) 하지만 문제가 많았다. 그에게는 무력과 민심이 있었다. 두 가지 모두 선조 이연에게 없거나 그를 압도하는 덕목이었다.

1597년 2월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체포돼 고문 끝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백의종군했다.

전란 초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부대가 구해줬던 원균이 그를 모함하는 데 있는 힘을 다했다(搆誣舜臣 不遺餘力).(류성룡, '징비록')

일본으로 귀국했던 가등청정 부대가 다시 침입한다는 거짓 정보가 문제였다.

이순신은 이미 조선에 상륙해 있는 일본군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선조 정부는 이 정보를 신뢰하고 공격을 명했다. 이순신은 거부했다.

선조는 그에게 세 가지 죄를 물었다.

'조정을 기만해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놓아줘 나라를 저버린 죄, 남의 공을 가로채 모함한 죄'.(선조실록 1597년 3월 13일)

이미 두 달 전 선조는 처벌을 작심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은 청정(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如此之人 雖得淸正之頭 不可容貸)."(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이날 풍경을 기록한 류성룡의 '징비록' 초고(草稿)에는 '임금이 죽이고자 원하여(上欲誅之)'라고 적혀 있다.

조선 해군총사령관이 전쟁 최전방에서 파면됐다. 모든 사람이 죽이라 찬성했지만, 판중추부사 정탁이 강력하게 사형 불가를 주장했다. 이순신은 거의 죽을 만큼 고문을받고(栲訊幾死·이덕형, '한음문고') 백의종군 끝에 복직 명령을 받았다. 8월 3일, 출감 4개월 만이었다.

백의종군 길, 합천을 지날 때였다.

꿈을 꾸었다. 시체가 많이 널려 있어서 밟기도 하고 목을 베기도 하는 꿈이었다.(난중일기 1597년 7월 14일) 이틀 뒤 칠천량에서 조선 해군이 전멸했다. 그리고 20일이 지난 8월 3일 경남 진주에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복직 명령을 받았다.

선전관 양호가 가져온 문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군직 임명장인 사부유서, 하나는 모친상 중인 이순신을 탈상시키고 복직시키겠다는 복귀 명령서, 기복수직교서다.

명령권자 선조가 이렇게 썼다. '이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무슨 할 말이 있겠나(亦出於人謀不臧而致今日敗衄之辱也 尙何言哉 尙何言哉).'(이순신 기복수직교서 중)

9월 7일 이순신은 장계를 올린다.

'신에게는 배가 열두 척이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해 항전하겠나이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이충무공행록) 그리고 16일 명량해전에 출전해 승리했다. 150척이 넘는 적군을 물리쳤다.

그날 밤 그가 일기를 쓴다.

'천행이다(天幸).' 전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러하면 이기고 저러하면 패하리라 가르쳐줬다고 했다.(9월 15일 일기) 참으로 천행이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은 백의종군 이후 단 한 번도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지 않았다.

망궐례는 국왕이 있는 궁궐을 향해 올리는 충성 의식이다. 하지만 복직 후 노량해전까지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우직한 군인답지 않은 기록이 보인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난중일기 1597년 8월 12일)

정치에 대한 불만은 전쟁 초부터 있었다.

'비밀 교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그런 적이 없다.'(난중일기 1594년 9월 3일)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보니 개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난중일기 1596년 5월 25일)

명량대첩 이후 서해 군산 앞 선유도까지 후퇴했다가 해남 우수영에 돌아와 보니 참혹뿐이었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9일) 그 무렵 그가 독후감을 쓴다.

'송사(宋史)를 읽다(讀宋史).' "무릇 신하 된 자로 군주를 섬기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夫人臣事君有死無貳)." 왜 그 참혹 속에서 죽음으로 군주를 섬겨야 한다고 썼을까. 복잡한 심리가 읽힌다.

명량대첩 한 달 후 선조가 명나라 장수 양호를 접견했다.

덕담이 오가고, 선조가 말문을 열었다.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捕捉些少賊)은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非有大功伐)'

양호가 대답했다.

'흩어진 전선을 수습해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하다.'(선조실록 1597년 10월 20일). 두 달 전 '할 말 없다'고 거듭 고백하며 복직 명령을 내리고, 그보다 다섯 달 전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던 지도자가 한 말이었다. 사소한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전투 때 전사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종전 후 멸망했다. 대륙은 청나라가 차지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정부가 들어섰다.

1623년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한산도 주민들이 집단 연명해 통제사에게 청원서를 올렸다.

'전복과 홍삼 진상과 관아 부역이 과하여 천여 가구가 넘던 인구가 삼백으로 줄었다'고 했다.(한산도민등장·閒山島民等狀) 이순신이 기대했던 세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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