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3. 10:36ㆍ나는 王이로다
광해군15년(1623.3.12) 이귀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정원대원군의 아들(능양군)을 옹립하였다
李倧(종)
재위 1623.3.13.-1649.5.8 (26년)
재세 1595.11.7.-1649.5.8.(54세)
부인- 6명, 자-9(2남,1녀)
-인열왕후 한씨-4남(소현세자,봉림대군(효종),인평대군,용성대군)
-장렬왕후 조씨(43세와 15세)
-귀인조씨-2남1녀, 귀인장씨, 숙의나씨, 숙원장씨
-장릉(합장릉,파주장릉),휘릉(장렬왕후한씨,동구릉),소경원(소현세자)
임진왜란 와중인 1596년 음력 2월 13일 명나라 사신 여희원과 조선 통역사 하세국이 압록강을 건넜다.
그 전해 조선 영토 안에서 인삼을 캐다 벌어진 여진족 27명 살해 사건에 대한 협상단이다.
협상단이 3열로 서 있던 보병 6000여명을 사열할 무렵 사령관 구령에 맞춰 3000여 기마군이 일제히 부동자세로 정렬했다. 협상단이 흠칫했다. 전쟁 초 "왜적을 물리칠 원군을 보내주겠다"고 했던 여진족의 청이 떠올랐다.
명과 조선은 "오랑캐 진위를 알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었다.
여진족 추장 노을가적(老乙可赤)이 말했다. "호인(胡人)이 함부로 인삼을 캤으니 우리가 먼저 잘못을 범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사람이 마음대로 호인을 죽였으니 어찌 분개한 마음이 없겠는가. 그 원수를 갚고자 한다."
간이 콩알만 해진 협상단 앞에 추장 노을가적이 몸을 낮춘다.
"천조(天朝·명나라) 어르신이 이처럼 누추한 곳에 왕림한 것은 전고에 없었던 경사다. 내 어찌 감히 함부로 병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범하겠는가." 협상단 얼굴에 미소가 올라오던 그 순간 분을 삭이던 추장이 소리를 높였다.
"풀 한 뿌리를 훔치는 게 죄가 얼마나 크다고 다 죽인단 말인가. 일찍이 군사를 동원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조-명 협상단 얼굴이 흙빛이 됐다.
침묵을 깨고 여진 추장이 결론을 내렸다. "지금 천조의 명령이 있으므로 중지한다." 협상단은 오랑캐 추장 하나 잘 구워삶았다고 안도하며 다시 압록강을 도강했다.
임진왜란은 여진의 도움 없이 종료됐다.
그 며칠 전 이 추장은 선물을 들고 찾아온 조선 사신 김희윤에게 "나라 대 나라로 조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제안은 거절당했다. '희윤은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말을 빨리 달려 되돌아왔다.'(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2월 1일) 이 오랑캐 추장이 훗날 명을 멸망시키고 대청 제국을 건설한 청 태조, 누르하치다.
김희윤의 두려움은 정책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조는 명나라 은혜를 잊지 못했다. 명나라는 그때 군사를 일으켜서 조선을 돕지 않았던가. 전쟁 당시 왕이던 선조는 이순신 '따위' 조선 장수들과 의병 대신 황제국 명나라에 모든 공을 돌렸다.
그때 명나라 인구는 1억명 정도였다. 만주 땅 여진족은 다섯 부족 다 합쳐 100만명 정도였다.
그 무렵 걸출한 추장 누르하치가 여진족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전쟁 후 왕이 된 광해군은 국가 생존을 위해 이 새로운 세력에 친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명에 대한 배신자라는 핑계로, 그때 야당 세력이던 서인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등극시켰다. 쿠데타 명분이 친명(親明)이었다. 인조 또한 당연히 친명이었다.
친명은 즉 배청(排淸)이었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1626년 아버지에 이어 왕이 된 홍타이지는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명나라 잔당 모문룡을 조선이 보호하고, 교역 요청을 거듭 거부한 데 따른 보복이었다. 강화도까지 도망갔다가 올라온 인조 정권은 배청 정책을 강화했다. 문신(文臣)들은 전쟁 불사를 외쳤고, 무신(武臣)들은 협상을 요구했다. 인조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반정 공신인 문신들 말을 따라야 했다.
1636년 2월 후금 권력자 용골대와 마부대가 조선에 입국했다. 가지고 온 서류에 인조 정권이 경악했다.
'후금이 황제국임.' '용골대를 죽이고 머리를 잘라 명나라로 보내자'는 상소가 올라왔다.
2월 26일 사신 일행이 창덕궁을 찾았다. 조선 정부는 창덕궁 금천교 옆에 천막을 쳐놓고 그리 인도했다.
푸대접에 분을 삭이고 있는데, 강풍에 천막이 날아갔다. 중무장한 궁궐 수비대가 천막을 에워싸고 있었다.
용골대와 마부대는 서둘러 원대 복귀했다.
전쟁 냄새를 맡은 조선 정부는 3월 1일 국경 지역에 '오랑캐와 절교하니 방어 태세를 갖추라'고 왕명을 내렸다. 3월 7일 왕명 문서를 들고 가던 전령이 원대 복귀 중이던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혔다.
4월 11일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심양에서 열린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조선 사신 두 사람이 참석했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는데, 두 사람은 절을 하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이 둘에게 '형제국을 무시한 행위'라는 국서를 들려 보냈다. 조선 정부는 국서를 가지고 온 두 사람을 '왜 자살하지 않았는가'라며 귀양을 보내버렸다.
"우리 국토가 수천 리인데 어찌 움츠리고만 있을 것인가." 6월 17일 또 내린다. "우리는 명의 동쪽 신하국으로, 명이 땅을 잃었다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리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 하지도 않는 정권이었다. 그해 10월 청 태종이 선언했다. "11월 25일 전 화친을 결정하라. 아니면 동정(東征)하리라. 나는 큰길을 통해 곧장 경성으로 향할 것인데, 산성을 가지고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귀국이 믿는 것은 강화도지만 내가 팔도를 유린하면 일개 섬으로 나라가 되겠는가. 귀국 유신(儒臣)들이 붓을 들어 우리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청 태종이 말하는 그대로 전쟁이 시작됐고, 끝났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터졌다.
압록강에서 서울까지 10여개 성은 그대로 놔두고 청군은 순식간에 서울로 진입했다. 청 태종 예언대로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인조는 그 속도에 눌려 숭례문 대신 시체들을 운반하는 문인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산성에 들어간 지 13일째. 성 안에 말 먹일 풀이 떨어져 말들이 굶어 죽었다. 그 말을 거둬 군사들이 먹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성 밖에 있는 청군에 술과 소를 대접했다.
관료들은 "고위직을 보냈다가 억류되면 창피하니 아랫사람을 보내자"고 했다. 소 두 마리와 돼지 세 마리, 술 열 병을 가지고 하급 관리가 갔다.
청 태종이 말했다. "굶주린 그대들이 나눠 먹어라. 팔도의 술과 고기는 우리 맘이다." 관료들은 "술을 보내자는 놈 목을 베자"고 주장했다.(인조실록) 심열(沈悅)이라는 유생이 화친하는 계책을 세우기를 청했다. 조정이 격분해 상소문을 불살라버렸다.
12월 29일 전시 사령관 김류가 산성 북문 밖에서 전투를 벌였다. 적은 싸우려 하지 않고 소와 말을 두고 물러났다. 김류가 비장 유호를 시켜 나가지 않는 자를 목 베게 하였다.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였다. 온 군사가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려갔다. 매복한 적에게 200명이 몰사했다.
11일 뒤 밤에 한 장교가 성 밖에서 적의 목을 베어 들고 왔다. 김류가 목을 받아 인조에게 올리자 옷감 세 필을 상으로 주었다. 머리에 피가 한 점 없어 기이했다. 잠시 뒤 보니 북문 전투에서 적에게 죽은 사람 목이었다.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연려실기술) 김류가 왕에게 스스로 처벌을 요구했으나 왕은 그대로 두었다.(인조실록)
김류는 인조반정 일등공신이다. 또 다른 일등공신인 조선군 총사령관 김자점은 청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할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도주했다. 그 또한 전후 무사했다.
망궐례 격식을 두고 관료들끼리 난상토론을 벌인 뒤 임금과 세자 부자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청 태종은 산성 동쪽 벌봉에서 대포를 겨누고 지켜보고 있었다.(인조실록)
이튿날 청 태종이 사신에게 말했다. '자식이 거꾸로 매달린 듯 위급한데 아비로서 구원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아비처럼 섬기던 명이 어떻게 너희를 구원할까?'(연려실기술) 정권을 창출한 공신은 무능력해도 개의치 않았고, 중화기로 무장한 적 앞에서 최고 지도자가 춤을 추었다. 전쟁이 되겠는가.
김경징은 남한산성 사령관 김류의 아들이다. 그리고 강화도 수비 총책임자였다. 그런데, '…(김포 나루에서) 경징이 배를 모아 그의 가속과 친구를 먼저 건너가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사족 남녀(士族男女)가 수십 리나 뻗쳐 있었으며, 빈궁 일행이 나루에 도착해도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한 채 이틀 동안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었다. 사녀들이 온 언덕과 들에 퍼져서 울부짖다가 적병이 들이닥치니 차이고 밟혀 혹은 끌려가고 혹은 바닷물에 빠져 죽어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과 같았으니 참혹함이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연려실기술) 쓰러진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경징아, 경징아 네가 이럴 수 있느냐…'
김경징은 추위를 이긴다는 핑계로 술을 마셨고, "바다가 꽁꽁 얼었으니 배가 뜰 수가 없다"며 청군의 공격을 무시하였다. 청군이 바다를 건너자 "우리 아버지가 마련한 무기이니 함부로 쓸 수 없다"며 군사들을 맨손으로 출정시켰다. 달아난 김경징 대신 부관 강진흔이 분전했으나 결국 청나라 전군(全軍)이 성으로 들어왔다.
강화도 함락 소식과 함께 남한산성 농성전도 끝났다. 47일 만이다.
조선 국왕 인조는 잠실 한강변 삼전도로 나가서 땅에 이마를 찧고 군신의 맹세를 했다.
전쟁 후 강진흔은 패전을 이유로 유배형을 받았다가 벌이 가중돼 처형됐다. 군졸들은 친척을 잃은 것같이 슬퍼하였다.(병자록)
1684년 경기도 가평군수 이제두는 가평 조종천변 바위를 조종암이라 이름 붙이고 글자 22자를 새겼다. 그중에 '萬折必東 再造藩邦(만절필동 재조번방)'이라는 선조 어필이 눈에 띈다. '황하가 일만 번 굽이쳐도 동쪽으로 흐르니, 명나라가 도와서 나라를 되찾았네.' 명이 망하고 40년이 지난 뒤였다.
"세상이 좁으니 소리 내 울 곳이 없구나"
오래 기침병을 앓다가 그가 죽으니 나이 서른여덟 살이었다.
벼슬살이는 크게 하지 못하였으나,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사내였다.
평안도 도사로 취임하러 갈 때 죽은 기생에게 술잔을 올리는 객기,
단종 복위를 꿈꾸다 죽은 사육신 혼령을 빌려 정치판을 힐난하는 호기를 지닌 사내였다.
죽음 직전에 그가 이렇게 이른다.
"나를 위해 곡하지 말라(勿哭)." 울지 말라는 이유가 웅대하다. 문중 족보 '나주임씨세승(羅州林氏世乘)'에 이리 기록돼 있다('성호사설'에는 일부 자구(字句)가 다르다).
뭇 오랑캐가 황제라 칭했는데 /조선만 홀로 중국을 섬기니/살아서 무얼 하며/죽어서 뭐가 한이 되리/울지 말라 ( 四夷八蠻 皆爲稱帝 獨朝鮮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恨 勿哭)
유언은 역모 사건의 빌미가 되고, 300년 세월 회자돼 실학(實學)의 씨앗이 되고, 식민 망국 지식인에게 위로가 되었다.
통 큰 사람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 1587) 이야기다.
조선이 개국한 지 157년 만에 전남 나주에서 임제가 태어났다.
외손자 허목에 따르면, 임제는 '뜻이 너무 커서 세상과 맞지 않아(不適於世)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고 예조정랑에 그쳤다.'(허목, '기언', '자서·自序') 삶은 모범적이지 않았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기생과 술을 끼고 살았다. 그러나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 하루에 수천 자를 외웠고 문장이 호탕했다.
세상을 돌아다니다 1570년 속리산 기슭 보은 북실마을에서 스승을 만났다. 스승 이름은 성운이다. 성운은 형이 사화에 연루돼 죽자 은거한 선비다.
그가 임제에게 이런 시를 써준다. '젊은이는 뉘 집 자제인고 / 시가 이장군 같구나 / 언제 다시 만나랴 / 헛되이 북녘 구름만 보네(少年誰氏子 詩似李將軍 何日重相見 徒勞望北雲)'(성운, '대곡집', '술 취해 임씨 수재에게 주다·醉贈林秀才')
거친 제자에게 스승은 '중용(中庸)'을 읽으라 했다. 800번 읽었다. 6년 동안 중용을 깨치고 그가 결론을 내렸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지만 속세가 산을 떠나네(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이수광, '지봉유설' 14, '시예·詩藝')
그리고 속세로 돌아와 과거에 급제했다. 1576년이다. 벼슬길이 열렸다. 이듬해 대과에 합격해 제주목사인 아버지에게 어사화와 거문고와 칼 한 자루를 들고 가서 자랑까지 했다. 그런데 벼슬하기에는 좋지 않은 세상이었다.
1575년 을해년, 조선 정치판에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동인과 서인이 갈라지는 을해분당(乙亥分黨) 사건이다. 이후 300년 넘도록 조선 정치는 치열한 정쟁 터가 되었다. 사람이 도를 떠나는(人遠道) 세상이 된 것이다.
임제는 '굽혀서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지 않은 탓에 벼슬이 현달하지 못했다.'(허목, '임정랑묘갈문') 대신
'기방, 주사에서 자유분방하게 노니는가 하면 가끔 슬픈 노래로 강개한 기분에 잠기기도 하니 사람들은 영문조차 헤아릴 수 없었고,' '굳이 먹을 잡아 입을 검게 만드는 짓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였다.'(백사 이항복, '백호집' 서·序)
임제는 보검을 차고 준마를 타고 하루 수백 리를 달리며 세상을 주유했다.(이식, '택당집', '오평사영·五評事詠') 사육신의 혼령을 불러내 당대 간신들을 비판한 소설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간신 무리에 혹했다가 망해간 왕조들을 꽃들로 비유한 소설 '화사(花史)', 충신과 간신 사이 갈등을 풀어낸 '수성지(愁城誌)'가 그가 쓴 작품들이다.
휴정과 유정 같은 선승과 교류하고 열두 살 연상 친구 옥봉 백광훈과 함께 풍류를 즐기고 다녔다.
백광훈은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임제와 백광훈이 개경에 놀러 가 부잣집에 하루를 묵었다.
임제가 주인에게 수작을 걸었다. "내 하인 놈이 글을 잘하니 시나 한 수 들으려오?" 임제가 백광훈에게 "京(경) 자로 읊으라"고 명했다. 이에 백광훈이 붓을 날리는데 일필휘지였다. 집주인이 이리 말한다. "전라도에서는 백옥봉과 임백호가 글이 제일이라던데, 글 잘하는 하인은 처음 보았소."
1582년 해남 현감 시절 백광훈이 죽었다. 임제는 '옥나무가 흙이 되니 청산에는 흰 구름만 남았다'고 슬퍼했다.
이듬해 평안도 도사로 임명돼 임지로 갈 때, 임제는 개경 황진이 무덤에서 조시(弔詩)를 썼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로 시작하는 시조다. 성리학을 배운 사대부가 기생을 추모하자 조정에서는 난리가 났다. 임제는 이듬해 병을 얻고 임기를 마쳤다.
중들과 친하고 죽은 기생을 애도하고 '오색 신기루가 바다 위에 떠오르게 하는'(이항복, '백호집' 서)
글재주로 세상을 조롱하던 선비 임제는 1587년 음력 8월 11일 폐병으로 죽었다. 죽기 전 자기 추모시를 썼다. '먼지 많은 세상 학을 타고 벗어난다(如今鶴駕超塵網)'고 했다.(임제, '자만·自輓')
그리고 남긴 유언이 '울지 말라'였다. 세상은 광대무변하고 가슴속은 터질 것 같은데 정치하는 자들은 그저 중국만 바라보며 쌈박질만 하고 있으니, 이 세상 떠나도 슬플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학을 타고 하늘로 갔다.
그가 죽고 2년 뒤 피바람이 불었다. 야당이던 서인이 동인을 박멸시키고 정권을 잡은 기축사화다.
마이산이 있는 전북 진안에서 동인 정여립이 반란을 꾀했다는 것이다.
서인 당수 송강 정철이 주도해 1000명이 넘는 동인을 처형했다. 반군 토벌대장 민인백이 토벌 작전 직전 정여립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생전에 임제가 '세상 모두 천자(天子)라 칭했는데 우리나라만 그렇지 못하다. 언젠가는 반드시 천자라 해야 하리라'고 하더라."
그러자 정여립이 말했다.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王侯將相 寧有種乎)." 이를 듣고 임금이 말했다. "천하를 삼킬 도적임을 알겠다."(민인백, '태천집(苔泉集)' 2, '토역일기·討逆日記') 아들 임지 또한 '협기를 부리고 멋대로 행동하여' 함께 유배형을 받았다.(1590년 4월 1일 '선조수정실록')
1780년 정조 4년, 청나라 사신으로 가는 형님을 따라 마흔셋 먹은 선비 박지원이 북경으로 떠났다. 압록강 건너 열나흘 걸려 7월 8일 요녕성 요양시 외곽에 이르렀을 때, 문득 천지사방이 확 트이는 것이다. 박지원이 내뱉었다.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 번 울 만하구나(好哭場 可以哭矣). 내 처음으로 인생이란 아무 의탁한 곳 없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중략) 아이가 태중(胎中)에서 갑자기 넓고 훤한 곳에 터져 나와 손발을 펴니 어찌 제멋대로 외치지 않으리오!"(박지원,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그 광대무변한 신천지에서 돌아와 박지원은 무역과 상공업을 외치는 실학 북학파 선구가 되었다. 임제가 꿈꾸던 그 세상을 본 것이다.
1902년 매천 황현(1855~1910)이 임제 고향 나주를 찾았다. 스러져가는 나라 선비가 무덤 앞에서 이리 읊는다. '영웅이여 구천에서 한스러워 마소 오늘날 조정에는 황제의 의자 높나니(九原莫抱英雄恨 今日朝廷帝座高)'(황현, '매천집', '회진촌 임제 옛 거처에서 읊다·會津村林白湖故居感賦') 나라가 망하기 8년 전이니 어좌에 앉은 대한제국 황제는 고종이다. 그 황제도 세상도 거침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훗날 사학자요 독립운동가 문일평(1888~1939)이 이렇게 쓴다. '임제가 남긴 이행(異行) 중 가장 로맨틱한 것은 유언이다. 중국 주위 이민방(異民邦)이 다 한 번씩 제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했다. 몽고인은 네 번, 만주인은 두 번이나 제국을 세웠다. 조선인은 한 번도 세우지 못했다. 임제가 죽을 때는 청 제국은 아직 싹도 트기 전이다. 그로 하여금 청 제국을 보게 했다면 더 개탄했을지 모른다.'(문일평, '호암사론사화선집', '소하만필·銷夏漫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