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022. 12. 23. 14:06나는 王이로다

중종의 서손, 명종의 서이복조카, 덕흥대원군(하원군,하릉군,하성군)의 서자

李鈞()昖(연)

재위 1567.7.3.-1608.2.1 (41)

재세 1552.11.11.-1608.2.1.(56)

부인- 10, -25(14,11)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51세와 19세 왕비)-11(영창대군(55세 득남),정명공주)

-공빈김씨-2(임해군(성격 포악),광해군)

-인빈김씨-45(의안군,시성군,정원대원군(원종)(능양군,능원군,능창군),의창군,정신,정헤,

정숙,정안,정휘공주)

-순빈김씨-1, 정빈민씨-23,정빈홍씨-11, 온빈한씨-31, 귀인정씨, 숙의정씨

-목릉(동원이강릉,목릉),성묘(공빈김씨)순강원(인빅김씨)

1419년 조선 4대 왕 세종이 왜구 본거지 대마도를 정벌했다.

1449년에는 두만강 유역 여진족을 소탕하고 4군 6진을 설치했다.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무리를 단칼에 처단한 이 나라에 143년 뒤 전쟁이 터졌다. 임진왜란이다.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된 사절이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다치바나는 기행(奇行)을 남겼다. 상주에 도착해 목사 송응형이 기생 춤과 음악으로 접대하자 이리 말했다.

"전쟁 속에 산 나야 그렇다고 쳐도, 노래와 기생 속에 아무 걱정 없이 지낸 당신 머리털이 희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다치바나가 서울에 도착하니 예조판서가 잔치를 베풀었다. 술잔이 돌고 다치바나가 후추 알들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기생과 악공들이 서로 다투며 줍느라 대혼란이 벌어졌다.

다치바나가 통역관에게 탄식했다. "너희 나라는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다. 망하지 않기를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류성룡·징비록)." 다치바나는 보았다.

대마도 정벌과 6진 건설 이후 100여 년 사이 망가진 스산한 조선을. 다치바나가 보고 들은 바는 고스란히 일본 정부에 보고됐다. 1586년, 임진왜란 발발 6년 전이다.

1592년 음력 4월 14일 대마도를 떠난 일본군 본진이 부산에 상륙했다.

이튿날 동래부사 송상현은 분전 끝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서 죽음을 맞았다.

평화로운 시절 부산을 자주 찾아 안면이 있던 일본 장수 다이라(平調益)가 옷깃을 끌며 피하라고 눈치를 줬다. 송상현은 거부했다. 그가 죽은 뒤 다이라는 탄식하며 시신을 관(棺)에 넣어 성 밖에 묻고 푯말을 세웠다. 다이라의 상관인 대마도주 소요시토시(宗義智)는 송상현을 죽인 병사들 목을 베 예를 올렸다. 동래가 함락되고 문경이 함락되고 충주에서 신립이 8만 병사와 함께 죽었다.

4월 28일 최고 지도자 선조가 회의를 열었다. 선조가 발의한 안건은 한양 포기 여부였다. 수도를 포기한다고?

영의정 이산해는 그저 울기만 하다가 "옛날에도 피란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선조실록). 이틀 뒤 폭우 속에 울부짖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선조 일행이 임진강을 건넜다.

5월 초하루 선조가 강 건너 동파역에서 야전회의를 주재했다. 역시 안건은 피란 여부였다.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지도자 본심이 드러났다.

'내부(內附)'는 명나라 영토 요동으로 들어가 귀순한다는 뜻이다. 수도를 떠난 게 엊그젠데, 나라를 떠난다고?

이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승지 이항복은 찬성했다. 좌의정 류성룡은 거칠게 반대했다.

요동 망명은 무산됐다. 도주하는 내내 선조는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 손에 죽을 수는 없다"며 아쉬워했다.

음력 5월 7일 피란을 거듭하던 조선 정부 지도부가 평양에 도착했다. 그 사이 한강 방어선은 도원수로 임명된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이 맡았다. 한양 수비는 우의정 이양원이 담당했다. 바닷물처럼 밀려든 일본군 앞에서 도원수 김명원은 퇴각을 결정했다. 결사 항전을 외치던 부원수 신각 부대와 이양원의 한양수비대도 결국 흩어졌다. 경기도 양주에서 이들은 함경 남병사 이혼이 이끄는 병력과 극적으로 만났다.

5월 16일 세 지휘관이 이끄는 조선 육군과 일본군 선발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양주와 파주를 잇는 해유령 고개였다. 일본군 70여 명 전원 사살. 임진왜란 육전(陸戰) 첫 승리였다.

사흘 뒤 승전보를 평양으로 보내고 기다리던 이들 앞에 조정에서 보낸 선전관이 도착했다. 선전관이 어명을 읽었다. "비겁한 장수 신각의 목을 쳐라." 부대원들 앞에서 신각이 목 잘려 죽었다. 달아난 도원수 김명원이 "무단 이탈한 신각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보고한 탓이다. 선전관이 남쪽으로 출발한 직후 신각이 올린 전승 보고서와 일본군 머리 70개가 평양에 도착했다. 또 다른 선전관을 급파했으나, 허공으로 달아난 명예와 흩뿌린 피, 땅에 떨어진 군사들 사기는 회복할 수 없었다.

그즈음 함경도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주모자는 국경인(鞠景仁). 가담자는 함경도 주민들이었다. 전주 사람 국경인은 나라에 죄를 짓고 회령으로 쫓겨난 하급 벼슬아치였다.

7월 1일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회령에 접근하자 이들은 선조의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을 '모두 결박하고 마치 기물(器物)을 쌓아놓듯 한 칸 방에 가둔 뒤' 일본군에 넘기고 항복해버렸다(선조실록). 훗날 의병부대에 의해 타도될 때까지 이들은 회령 일대에서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주민들이 왕자들이 가는 길마다 일본군 보라고 왕자들의 행방을 적어 붙이고 다녔다"는 것이다.

두 왕자가 함경도로 간 목적은 근왕병 모집과 주민 위로였다.

그런데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들의 좋은 말과 보화를 보면 기필코 약탈해갔다. 적을 앞에 두고 백성들을 흩어지게 할 생각밖에 없었다(見人善馬寶貨則必掠之望賊思散之民).'(이호민·오봉집(五峯集)) '민간을 겁박하고 수령을 핍박해 인심을 크게 잃었다(侵撓民間逼責守令大失人心).'(권용중·용사일록(龍蛇日錄)) 엄혹한 전란 속에 갑질을 해댄 것이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어떤 왕자인가.

임해군은 '사람 죽이기를 초개같이 하다가 벌을 받으니 도성 안 백성들이 춤을 췄다.' 순화군은 '눈먼 여자의 이 열 개를 쇠뭉치로 깨고 집게로 잡아 빼 결국 죽게 하기도 했다(선조실록).' 전쟁 후에도 악행은 끝이 없었다. 아비 선조는 이들을 벌하라는 상소에 대개 귀를 닫거나 처벌을 불허하곤 했다.

각각 스물한 살, 열세 살에 불과한 이 무뢰한들에게 선조는 군사 모병과 주민 위무 책임을 맡긴 것이다. 반란은 자연스러웠다. 인질이 된 두 왕자는 오랜 기간 휴전 협상에 큰 걸림돌이 됐다. 휴전협상에 임했던 명나라 사신 심유경에게 임해군은 이렇게 말했다. "나만 풀어주면 한강 이남 땅은 마음대로 나눠 가지라(징비록)."

반란군을 제압하고 함경도를 수복한 전투가 북관대첩이다. 총사령관은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였다. 정6품이니 그리 높은 직급은 아니었다. 주력부대는 의병이었다. 일본군과 국경인의 행패를 쓰라리게 겪은 주민들도 반란군에서 대거 이탈했다. 음력 9월에 거병한 정문부 부대는 10월 총공세에 들어가 반란군 지도부를 죽이고 적지를 속속 회복했다. 두 왕자를 적에게 넘긴 반란군 토벌이 첫 번째 목적이었으니, 참으로 대의명분에 충실한 전투였다. 실지 회복 또한 목적이었으니 이 또한 달성됐다. 그런데―.

'의병장 정문부의 전공(戰功)을 순찰사 윤탁연이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정문부의 부하가 왜군 목을 가지고 함경남도를 지나면 모두 빼앗아 자기 수하 군사들에게 주었다. 윤탁연이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에게 옷과 월동 장비를 주었으므로 그들이 조정에 돌아와서는 모두가 윤탁연을 옹호하고 정문부의 공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결국 종성 부사 정현룡이 함북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정문부는 급이 낮은 길주 부사에 임명됐다.

참고로 사관 박동량이 남긴 사초(史草) '기재사초'는 정현룡을 이렇게 기록했다. "종성부사 정현룡은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고 학대하면 원수다.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至有撫我則后虐我則讎 何使非臣何事非君)'라는 글을 쓰고 왜군에 항복하려다 글을 집어던지고 도주하였다."

6월 5일 평안도 안주에 도착한 선조가 명나라 장수 유원외를 접견했다.

유원외가 말했다.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었는데 근래에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이다(선조실록)." 해유령전투에서 신각과 함께 싸우다 참살을 목격한 함경 남병사 이혼은 임지로 복귀해 반란군과 전투 도중 전사했다. 역시 해유령 전투에 참전했던 우의정 이양원은 의주에 도착한 선조가 요동으로 넘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8일 동안 단식하다 경기도 이천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정문부는 전쟁 후 1624년 역모 혐의로 체포돼 고문 끝에 옥사했다. "벼슬할 생각은 하지 말고, 경상도 진주에 내려가서 숨어 살아라"라고 유언을 남겼다. 1665년 누명이 풀리고 1709년 북관대첩을 기념하는 북관대첩비가 길주에 건립됐다. 비석은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가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세워뒀다.

2005년 10월 20일 한국으로 반환된 비석은 이듬해 3월 23일 원건립지인 북한 김책시로 돌아갔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과 독립기념관,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정문부 묘소에 복제비가 서 있다.

해유령에는 1977년 전첩기념비와 사당이 섰다. 비석에는 참수된 신각을 추도하고 거짓 보고를 한 김명원을 비난하는 글이 적혀 있다.

김명원을 탓할 것인가. 자기 몸 보전에 급급했던 최고지도자와 붕괴된 국가 시스템, 전쟁을 대비하지 않은 정부를 탓해야 한다. 스스로 활과 창을 들고 나라를 지키려 한 백성을 무시한 지도부 책임이다.

해유령 전투 승리 열흘 전인 5월 6일 조선 해군이 거제도 옥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의지와 능력과 책임을 갖춘 장수 이순신이 지휘했다.

 

군인 이순신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서기 1597년 음력 2월 26일 조선해군 총사령관 이순신은 가덕도로 향하던 도중 사령부인 삼도수군통제영으로 귀대했다. 통제영은 경남 통영 한산도에 있다.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체포조가 대기 중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별 넷, 대장(大將)이 계급장을 떼이고 서울로 압송됐다. 체포조 옆에는 후임 사령관이 대기 중이었다.

후임은 원균이다. 압송되기 전 이순신은 원균에게 군비(軍備) 일체를 인계했다. 한산도 병영 내에는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이 있었고 각 군함에는 총통 300자루가 탑재돼 있었다.(이상 '이충무공 행록') 다섯 달 뒤 이 병력과 군수품은 거제도 옆 칠천량 바다에 몽땅 수장됐다.

'선전관 이순일 말이 "명나라에서 공에게 은청금자광록대부(銀靑金紫光祿大夫) 작위를 내려준다는 소문이 있더라" 하였으나 필시 헛소문일 것이다.'(난중일기 초고(草稿) 1593년 계사년 5월 5일)

이순신이 연전연승을 거두자 그가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소문이 이순신 본인에게까지 들어왔다. 전라좌수사로 전쟁에 임한 지 1년, 그리고 그가 전라, 충청, 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기 석 달 전이다. 광록대부는 명나라 종1품이다. 그 아래로 금자광록대부와 은청광록대부가 있으니 소문 자체가 낭설이다. 종1품이었던 소문 속 벼슬은 전쟁이 진행되면서 정1품까지 올라갔다. 소문은 중앙정부에까지 들어갔다. '순신의 직품은 정1품이었으니 자연 법전(法典)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겠으나'(선조실록 1598년 11월 30일) 1793년 정조가 내린 영의정 추증 교서도 '유명수군도독(有明水軍都督)'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중국 어느 사서에도 이순신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정1품 도독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최근 그가 황제로부터 받았다는 여덟 가지 팔사품(八賜品, 보물 440호)이 황제가 아니라 조명연합군 사령관 진린 선물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장경희, '통영 충렬사 팔사품 연구', 2014) 문제는 사실 여부가 아니다. 그 소문을 선조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14대 국왕 이연은 유능한 인물이었다. 주위 만류를 뿌리치고 정읍 현감 이순신을 7계급 특진시켜 전라좌수사로 임명한 지도자였다. 개전 초 전황이 가망 없음을 알고 요동으로 망명 갈 꿈을 꾼, 판단이 빠른 사람이었다. 조총(鳥銃)을 스스로 역설계해 조립도 하고, 각료들과 함께 전황을 토론하는 전술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기적이었다.

전쟁이 터진 지 14일 만에 중국으로 가려는 선조에게 관료들은 "왕세자부터 결정하라"고 주장했다. 왕이 떠나면 민심을 진정시킬 수 없다고 했다.(선조실록 1592년 4월 28일) 이틀 뒤 선조는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하고 의주로 달아났다. 백성들은 경복궁을 불태워 화를 달랬다. 이후 전쟁 준비와 백성 위무는 열일곱 먹은 광해군이 책임졌다. 육지에서는 그가 팽개친 백성이 의병을 일으켰고, 바다는 그가 낙점했던 탁월한 장수 이순신이 구했다.

백성으로부터 조롱과 비난을 받은 지도자는 그 분노를 군사에게 돌렸다. 의병장들과 이순신은 나라를 버린 지도자에게 분노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의병장 김덕령은 전쟁 도중 반란죄로 처형됐다. 전후 논공행상에서 퇴직 관리 출신을 제외하고는 의병장들은 한 명도 공신록에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 이순신이 황제국 명나라로부터 정1품 벼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순신 본인은 우직한 군인이었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뛰어넘어서(寵榮超躐) 분에 넘쳤다.'(난중일기 1595년 5월 29일) 하지만 문제가 많았다. 그에게는 무력과 민심이 있었다. 두 가지 모두 선조 이연에게 없거나 그를 압도하는 덕목이었다.

1597년 2월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체포돼 고문 끝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백의종군했다. 전란 초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부대가 구해줬던 원균이 그를 모함하는 데 있는 힘을 다했다(搆誣舜臣 不遺餘力).(류성룡, '징비록')

일본으로 귀국했던 가등청정 부대가 다시 침입한다는 거짓 정보가 문제였다.

이순신은 이미 조선에 상륙해 있는 일본군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선조 정부는 이 정보를 신뢰하고 공격을 명했다. 이순신은 거부했다. 선조는 그에게 세 가지 죄를 물었다. '조정을 기만해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놓아줘 나라를 저버린 죄, 남의 공을 가로채 모함한 죄'.(선조실록 1597년 3월 13일)

이미 두 달 전 선조는 처벌을 작심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은 청정(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如此之人 雖得淸正之頭 不可容貸)."(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이날 풍경을 기록한 류성룡의 '징비록' 초고(草稿)에는 '임금이 죽이고자 원하여(上欲誅之)'라고 적혀 있다.

조선 해군총사령관이 전쟁 최전방에서 파면됐다. 모든 사람이 죽이라 찬성했지만, 판중추부사 정탁이 강력하게 사형 불가를 주장했다. 이순신은 거의 죽을 만큼 고문을 받고(栲訊幾死·이덕형, '한음문고') 백의종군 끝에 복직 명령을 받았다. 8월 3일, 출감 4개월 만이었다.

백의종군 길, 합천을 지날 때였다. 꿈을 꾸었다. 시체가 많이 널려 있어서 밟기도 하고 목을 베기도 하는 꿈이었다.(난중일기 1597년 7월 14일) 이틀 뒤 칠천량에서 조선 해군이 전멸했다. 그리고 20일이 지난 8월 3일 경남 진주에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복직 명령을 받았다.

선전관 양호가 가져온 문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군직 임명장인 사부유서, 하나는 모친상 중인 이순신을 탈상시키고 복직시키겠다는 복귀 명령서, 기복수직교서다. 명령권자 선조가 이렇게 썼다. '이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무슨 할 말이 있겠나(亦出於人謀不臧而致今日敗衄之辱也 尙何言哉 尙何言哉).'(이순신 기복수직교서 중)

9월 7일 이순신은 장계를 올린다. '신에게는 배가 열두 척이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해 항전하겠나이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이충무공행록) 그리고 16일 명량해전에 출전해 승리했다. 150척이 넘는 적군을 물리쳤다. 그날 밤 그가 일기를 쓴다. '천행이다(天幸).' 전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러하면 이기고 저러하면 패하리라 가르쳐줬다고 했다.(9월 15일 일기) 참으로 천행이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은 백의종군 이후 단 한 번도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지 않았다. 망궐례는 국왕이 있는 궁궐을 향해 올리는 충성 의식이다. 하지만 복직 후 노량해전까지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우직한 군인답지 않은 기록이 보인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난중일기 1597년 8월 12일)

정치에 대한 불만은 전쟁 초부터 있었다. '비밀 교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그런 적이 없다.'(난중일기 1594년 9월 3일)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보니 개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난중일기 1596년 5월 25일)

명량대첩 이후 서해 군산 앞 선유도까지 후퇴했다가 해남 우수영에 돌아와 보니 참혹뿐이었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9일) 그 무렵 그가 독후감을 쓴다. '송사(宋史)를 읽다(讀宋史).' "무릇 신하 된 자로 군주를 섬기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夫人臣事君有死無貳)." 왜 그 참혹 속에서 죽음으로 군주를 섬겨야 한다고 썼을까. 복잡한 심리가 읽힌다.

명량대첩 한 달 후 선조가 명나라 장수 양호를 접견했다. 덕담이 오가고, 선조가 말문을 열었다.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捕捉些少賊)은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非有大功伐)' 양호가 대답했다. '흩어진 전선을 수습해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하다.'(선조실록 1597년 10월 20일). 두 달 전 '할 말 없다'고 거듭 고백하며 복직 명령을 내리고, 그보다 다섯 달 전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던 지도자가 한 말이었다. 사소한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전투 때 전사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종전 후 멸망했다. 대륙은 청나라가 차지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정부가 들어섰다.

1623년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한산도 주민들이 집단 연명해 통제사에게 청원서를 올렸다. '전복과 홍삼 진상과 관아 부역이 과하여 천여 가구가 넘던 인구가 삼백으로 줄었다'고 했다.(한산도민등장·閒山島民等狀) 이순신이 기대했던 세상은 아니었다.

 

그들이 협상을 하는 사이 조선은 철저하게 유린됐다

1902년부터 1940년까지 서울 용산구 용산문화원 자리에는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라는 일본인이 살았다. 고층건물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주변보다 높아 옛날에는 한강이 바라보였다. 사람들은 용산에서 보는 한강을 '용호(龍湖)'라 했다.

이노우에는 대한제국 시절인 1899년 전철 차량 제작을 위해 한성전기회사로 초빙된 기술자였다. 이후 여러 기술적 사업을 벌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사내였다.(김명수, '대한제국기 일본인 기술자 이노우에 요시후미 연구') 856평 너른 집터였다. 그 위쪽 1586평 대지는 나라 팔아먹은 대가로 막대한 돈과 백작 작위를 받은 을사오적 이지용(李址鎔) 소유였다.(1912년 총독부 지적도) 이노우에가 살기 전 집터에는 조두순이 살았다. 흥선대원군 시절 영의정을 지낸 사람이다. 띄엄띄엄 몇 십 년을 제외하고 집터는 대대로 조두순 집안 소유였다. 영·정조 때 벼슬을 했던 조두순의 증조부 조영극이 이 터에 정자를 짓고 살았다. 어느 즈음에 가문이 몰락하고 훗날 증손자 조두순이 입신양명을 하였다. 그때 조두순이 남에게 판 이 집터와 정자를 되사고 이렇게 기록했다. '용호에 임하여 조금 동쪽 기슭으로 들어진 곳에 정자가 있는데 심원정(心遠亭)이라 한다. 실로 내 증조부 치헌 공(치헌은 조영극의 호다)께서 처음 세운 것인데 중간에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가 거의 60년 후에 나 조두순이 다시 구입하였다.'(조두순, '무진루기발(無盡樓記跋)', 이종목, '조선 시대 경강의 별서' 재인용) 2018년 여름, 용산문화원 오른쪽 언덕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心遠亭 倭明講和之處'(심원정 왜명강화지처)라고 새겨져 있다..

바로 이 비석 이야기다. 1593년 4월 조선에서 벌어진 국제전쟁, 임진왜란 정전협상이 벌어진 자리다. 협정 당사국은 명나라와 일본이었다. 조선은 배제됐다. 협상은 결렬됐고 조선은 의지와 무관하게 유린당했다. 그 기념비가 용산에 있다. 왜 '명왜'가 아니고 '왜명'인가. 왜 임진왜란 200년 뒤 세운 정자 심원정 이름이 들어 있는가. 비석은 누가 세웠는가.

1592년 4월 14일 경상도 동래에 상륙한 일본군은 상주와 문경과 충주를 거쳐 한성으로 입성했다. 20일 걸렸다. 그보다 이틀 전 선조는 의주를 향해 도주했다. 마음속 목적지는 명나라 요동(遼東)이었다. 피란이 아니라 '내부(內附)', 황제국가로 들어가서 붙어살겠다는 뜻이었다.(1592년 5월 1일 '선조수정실록') 류성룡을 비롯한 몇몇 관료 만류에 발걸음은 압록강 남쪽 의주에서 멎었다. 그때 '나라는 나라가 아니었고(國非其國)'(이이, '진시폐소(陳時弊疏)', 1582년), '하늘이 도와야 살 수 있는(天贊)'(류성룡, '징비록') 나라였다. 곧 무너질 큰 집 같았다. 개전 60일 만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가 평양을 점령했다. 6월 15일 요동 총병 조승훈이 오천 기병을 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이 예뻐서 참전한 게 아니었다. '(압록강 너머 요동에서) 왜군을 막으려면 군사가 수십만 필요하지만 조선에서는 수만이면 된다(防守兵馬則當以數十萬計 數萬計與數十萬計).'(정탁, '經略侍郞宋應昌一本', 용사잡록) 명나라 총사령관 송응창이 조선 측 담당관 정탁에게 한 말이다. 조선이 패전하면 명이 위협받는다는 국익 논리였다. 안보. 더도 덜도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을 구원하러 온 이 천군(天軍)이 오랑캐에게, 평양에서 궤멸됐다. 7월 17일이다. 명나라는 이여송을 제독으로 한 2차 원군을 출병시켰다. 5만 대군이었다. 조명연합군은 이듬해 1월 평양에서 고니시 부대를 격퇴했다. 하지만 피로 얼룩진 승리였다. '명 군사 사상자도 많았으며 평양 전투에서 벤 수급 중 절반이 조선 백성이며,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1만여 명도 모두 조선 백성이라고 하였다.'(1593년 1월 11일 '선조실록') 뭐가 됐든 이 승전보에 의주에 있던 조선 정부는 환호했다. 지금부터 기이하다.

이여송은 '퇴로를 열어 달라'는 고니시 요청을 받아 이들을 무혈로 퇴각시켰다. 평양 참패 한 달 뒤 명은 이미 상인 심유경을 평양으로 들여보내 종전협상에 들어간 것이다. 목적은 일본군의 요동 진입 저지였다.

전비 마련을 위해서는 백성을 쥐어짜야 했다. 게다가 명나라에는 가뭄과 메뚜기 떼가 들끓어 막대한 피해가 나고 있었다(百姓之苦極矣 又加以旱災蟲災).(余繼登, '朝鮮撤兵議',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재인용) 명 지휘부는 대륙으로 확전을 막고 조선 내 국지전으로 전쟁을 끝내려 했다. 평양 회복으로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도 달성됐다. 적당한 선에서 발을 빼자는 작전이 이후 전쟁 종료까지 이어졌다. 이여송이 파견되기 전 심유경과 고니시는 평양에서 다시 한 번 만나 단기간 휴전에 합의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평양에 있던 고니시 부대는 이여송의 조명연합군에 참패해 남쪽으로 후퇴했다. 협상을 주도한 사람은 총지휘관 송응창이었고, 공을 다투던 이여송은 송응창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여송은 송응창을 무시하고 이들을 쫓아 남하하다가 경기도 파주 벽제관에서 매복전에 걸려 대패했다. 명나라 지휘부는 이를 계기로 무력전을 버리고 협상전을 확정했다.(한명기, '임진왜란기 명·일의 협상에 관한 연구') 겉으로는 전쟁이되 속으로는 강화요, 겉으로는 토벌이되 속으로는 위무(陽戰陰和陽剿陰撫)였다.(명사 조선열전 1597년 8월)

'이원익이 아뢰기를, '제독의 군중에게서 강화가 이루어진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환호 소리가 우레와 같았습니다'(元翼曰 提督軍中 一聞和議之成 莫不喜悅 歡聲如雷).'(1593년 3월 23일 '선조실록') 명나라 군사들은 귀향 소식에 환희작약했다. 조선군은 무장해제됐다. '송응창이 명군에게는 왜적을 죽이지 말라 하고 우리 군에게는 교전하지 말라 명했다. 저들은 나아가 싸울 뜻이 전혀 없다. 불공대천(不共戴天)의 흉적이 온전히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매우 통탄스럽다.'(1593년 4월 6일 '선조실록') 이순신은 '왜적을 섬멸하려 하여도 매번 (진린) 도독에게 중지당하니 걱정스럽기 그지없다(每爲提督所抑止 不勝悶慮)'(1598년 9월 10일 '선조실록')고 했다. 명에 절대적으로 의지했던 선조까지 '몇 부대가 거짓 투항하면 송응창이 마음을 돌릴 것'이라고 아이디어를 낼 정도였다.(1593년 3월 38일 '선조실록')

전쟁 내내 그랬다. 전쟁 후 1625년 조선에 왔던 명나라 학자 강왈광(姜曰光)은 '명이 조선의 믿음을 저버렸음에도 조선은 명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재인용)

벽제관 패배 후 이여송이 개성으로 퇴각했다. 행주산성에서 권율의 의병이 대승했다. 용산에 주둔해 있던 고니시 부대가 의병장 김천일을 통해 강화를 요청했다. 강화 협상은 지휘권을 가진 명나라가 맡았다. 조선은 배제됐다.('징비록')

1593년 3월 7일 명 대표 심유경이 한성 용산에 있는 고니시와 정전협상을 재개했다. 정전 조건은 서로가 황당했다. 명은 도요토미를 일본 왕으로 봉한다(일본은 이미 천황이라는 공식 왕이 있다), 일본은 명나라 황실 여자를 아내로 받는다, 조선을 일본과 명이 분할한다 등등.

협상은 이뤄질 수가 없었다. 협상 실무자끼리 조작한 조건을 주고받은 뒤 4월 19일 일본군은 남쪽으로 퇴각했다. 명군 총사령관 송응창은 후퇴하는 일본군을 호위하고, 조선군에게는 '군공(軍功)을 탐하여 뒤떨어져 있는 적을 살륙하는 자가 있으면 참형에 처한다'고 포고했다.(1593년 4월 26일 '선조실록') 일본군은 '풍악을 울리고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해상에 이르러'(1593년 4월 1일 '선조수정실록') 성을 쌓고 장기전에 들어갔다. 이여송의 동생 이여백이 기병 1만기를 앞세워 이들을 추격했는데, 갑자기 발이 아프다면서 가마를 타고 도로 성으로 들어왔다.(같은 날 '선조수정실록')

명 협상단은 5월 23일 바다 건너 나고야에서 도요토미를 접견했다. 6월 28일 협상단이 출국한 다음날, 조선 전역에서 집결한 10만 일본군이 진주성을 함락했다. 협상으로 손발이 묶인 조선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6만 성민이 전멸했다. 고니시의 협상 의사를 전달한 의병장 김천일도 이 전투 때 죽었다. 이후 4년 동안 협상이 진행되다가 결국 결렬됐다. 도요토미는 다시 조선 공격령을 내렸다. 정유재란이다. 1년 남짓한 전쟁이었지만 피해는 엄청났다. '조선'의 피해는 엄청났다. 전쟁은 이순신이 끝내고 죽었다.

임진왜란 300년 뒤 용산에 살게 된 일본인 집터에 '왜명강화지처' 비석이 서 있는 이유다. 기록에는 '(심유경이) 배에 이르러 고니시, 가토와 회담했다(到船 招平行長與言 而淸正亦會 相迎講和)'(1593년 3월 27일 '선조실록')고 돼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은 그 자리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정자 심원정이라 대대로 믿고 살았다. 잘못되었으나, 그리되었다. 심원정에 살던 이노우에도 그러하였다. 세운 사람도 날짜도 없는 이 수수께끼 비석을 없애면 안 되는 이유다.

 

선조가 선언했다 "가짜 도굴범을 진범으로 처형하고 국교를 회복하라"

임진왜란 개전 다섯 달 뒤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이런 보고가 올라왔다. '정릉(靖陵)이 파헤쳐지는 변괴가 있었다.'(1592년 9월 27일 '선조실록') 정릉(靖陵)은 광해군의 증조부 중종의 릉이다. 그때 광해군은 평남 성천에 있었다. 의주에 있던 선조에게는 사흘 뒤 보고가 들어갔다. 정확한 사태가 파악된 때는 7개월 뒤였다. 선조의 할아버지 중종 분묘가 파헤쳐지고 시신이 불탔으며, 산 너머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가 묻힌 선릉(宣陵)은 시신이 아예 사라졌다는 것이다.

왕릉 파괴 첩보를 처음 접한 사람은 관악산에서 한성 수복 작전에 돌입한 의병장 김천일이었다. 1593년 4월 17일 밤 김천일은 휘하 이준경과 서개똥(徐介同), 왕실 사람 이충윤을 현장으로 보냈다. 서개똥이 정릉 분묘 아래 광중(壙中)에 들어가 보니 관은 다 타버렸고 그 안에 시체가 가로놓여 있는데 머리털과 수염이 전혀 없었다. 주위에는 불탄 흔적, 밥을 해먹은 흔적이 있었다. 옆에 있는 선릉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1593년 8월 24일 '선조실록')

주인 없이 텅 빈 왕릉, 서울 강남 도심에 있는 선정릉(宣靖陵) 이야기다. 왕릉 도굴 사건을 둘러싸고 전쟁 후 한·일 국교 회복 과정에서 벌어진 이야기다(영화 '식스센스'에 버금가는 반전이 있다).

1592년 정월부터 이상한 동요가 도성에 퍼졌다. 맨 끝 가사는 '경기감사 우장직령(京畿監司雨裝直領) 큰달마기(大月乙麻其)'였다. 난리가 끝난 뒤 사람들이 이렇게 해석했다. '임금이 4월에 도망갔으니 그 달이 큰 달이며 큰달마기는 4월 그믐이라는 뜻이다. 마침 큰비가 내려 경기감사가 비옷과 직령(외투)을 입고 임금 가마를 뒤따르게 된다는 뜻이다.'(1592년 4월 30일 '선조실록')

4월 29일 선조가 선언했다. "마땅히 도망가지 않고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치겠노라(當與卿等 效死勿去)." 다음 날 새벽 어영대장 윤두수가 끄는 가마를 타고 선조가 북쪽으로 달아났다. 폭우가 쏟아졌다. '큰달마기'였다.6월 2일 평양에서 선조가 백성들에게 말했다. "죽음으로써 지키겠노라(以死守)." 여드레 뒤 중전이 평양성을 빠져나가다가 노비가 군(軍)과 민(民) 몽둥이를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성 안은 창과 칼과 고함 소리가 가득했다. 다음 날 선조는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향했다(上發平壤 向寧邊).'(6월 11일 '선조실록') 이후 전쟁 과정은 생략한다. 전쟁은 의병과 이순신과 류성룡이 치렀다. 7년 만에 전쟁이 끝났다.선정릉 현장 보고는 참담했다. 이미 1592년 12월 강릉(명종릉)과 태릉(문정왕후릉), 헌릉(태종 부부릉)이 일본군에 훼손됐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정도는 심하지 않았다.(1593년 1월 22일 '선조실록')

선릉에는 재만 남았고 정릉에는 정체불명의 시신이 있었다. 주변에는 밥을 해먹은 흔적, 옷을 태운 흔적이 있었다.(1593년 5월 4일 '선조실록') 선조는 "속히 처리하라"며 울었다. "생전에 중종 얼굴을 본 사람을 찾아 시신을 확인하라"며 얼굴을 가리고 또 울었다. 최초로 현장을 찾았던 이준경 일행은 석 달 뒤 시신이 '가로놓여 있었다(橫置)'고 보고했다.(8월 24일 '선조실록')

6월 28일 영의정 최흥원이 보고했다. 생전 중종을 기억하는 다섯 명이 그림을 그려 확인한 바, 중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척하고 갸름하며 턱 끝이 굽고 콧등은 높고 키는 크되 풍만하지 않았던' 중종과 다르다는 것이다. 여든이 넘은 판돈녕부사 송찬(宋贊)이 말했다. "확인할 길이 없으니 꿈같이 아득할 뿐입니다(恍然夢想而已)." 결국 그해 7월 21일과 8월 15일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선릉과 정릉이 개장(改葬)됐다. 선조는 명나라 총사령관 송응창에게 '선조(先祖)에 대한 망극한 애통을 호소한다'며 복수를 촉구했다.(1593년 4월 16일 '선조실록')

전쟁이 종료되면 당사국끼리 국교 협상을 벌인다. 요체는 전쟁 책임과 피해 배상이다. 조선 정부에게 그 책임은 일본의 사과였고 배상은 선정릉 도굴범 색출이었다. 이게 선조실록에 끊임없이 나오는 '2건(二件)', 바로 일본 국왕 사과 국서와 도굴범 압송이다.(1606년 7월 5일 '선조실록'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정권을 잡았다. 도쿠가와 정권은 대마도에 조선과 국교 정상화 협상을 맡겼다. 종전 이듬해인 1599년 7월 14일 대마도주 소요시토시(宗義智)는 명군(明軍) 인질과 피로인(被虜人) 즉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며 국교 정상화를 요청했다. 이듬해 2월 57명을 돌려주며 정상화가 안 되면 재침(再侵)하겠다고 위협했다. 1601년 4월 고니시 유키나가가 도쿠가와 이에야쓰에 의해 처형됐다. 소요시토시는 고니시의 사위였다. 목숨이 위태로운 소요시토시는 협상에 목숨을 걸었다.

1605년 5월 1년 전 대마도로 떠났던 사명당 유정이 피로인 3000여명을 데리고 귀국했다.(1605년 4월 1일 '선조수정실록'. '선조실록' 5월 24일에는 1390명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일본 국왕 명의 사과 문서는 없었다. 도굴범 색출도 없었다. 납치됐던 국민들이 돌아왔지만, 국교 정상화는 불가능했다. 조선 정부는 두 가지 요구 사항을 거듭 요청했다. 이듬해 대마도는 이를 받아들였다.(1606년 7월 4일~6일 '선조실록')

넉 달 뒤 11월 대마도 사신이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국서를 가지고 왔다. '누추한 우리나라가 전대(前代)의 잘못을 고치는 것에 대해서 지난해 사명당과 사신 손문욱에게 모두 이야기하였으니 지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1606년 11월 12일 '선조실록') 명의는 일본국(日本國) 원가강(源家康)이었고 일본 국왕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범능지적(犯陵之賊)', 왕릉을 능멸한 범인 2명도 함께였다! 최고 지도자 관심 사항인지라, 경상우수사는 '부산 앞바다에 전선 11척을 띄워 군대의 위엄을 성대하게 베풀었다.'(같은 날 선조실록) 이날 사관(史官)은 "하찮은 죄인 두 명이 올 뿐인데 온 나라가 밥 먹을 틈도 없이 서두른다"고 평했다. 국교 정상화 조건이 충족됐다. 2개월 뒤인 1607년 1월 12일 아침 국서에 대한 회답과 포로 송환을 위한 회답 겸 쇄환사 일행이 서울 남대문을 출발했다. 규모는 정사 여우길(呂祐吉), 부사 경섬(慶暹)을 단장으로 한 507명이었다.(경섬, '해사록(海槎錄)', 1607년) 조선과 일본은 1609년 기유약조를 통해 정식으로 국교를 재수립했다. 이제, 반전이다.

왜놈들에게 혹독한 고문이 시작됐다. 서른일곱 먹은 마고사구(麻古沙九)는 "전쟁 동안 서울에는 올라오지도 않았다"고 부인했다. 인두로 지져도 "이럴 줄 알았다면 배를 갈라 죽을지언정 어찌 나올 리가 있었겠는가"라고 했다. 스물일곱 살짜리 마다화지(麻多化之)는 "조선땅 자체가 처음"이라며 "'조선에 가서 허튼소리 하지 않는다면 너의 어미와 아내는 후하게 보살피겠다'는 말에 속았다"고 했다. 11월 18일 시작된 고문은 한 달을 끌었다. 좌부승지 박진원(朴震元)은 "모래에 파묻어도 봤지만 발악만 하고 있다(但有發毒)"고 보고했다.(1606년 11월 19일 '선조실록') 마고사구와 마다회지에게는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12월 18일 추국청이 보고했다. "범행이 미심쩍기는 하나 속히 처참하는 것이 마땅함." 선조가 일렀다. "진범이 아니라도 왜인으로서 적이 아닌 자가 있겠는가." 처형을 허락하며 선조가 덧붙였다. "헌부례(獻俘禮)만 하지 않으면 된다(不爲獻俘)." 헌부례는 전쟁 포로를 종묘에 바치는 의식이다. 종묘까지 속이는 기만적 승리였다. 왕실 조상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뜻이다. 두 사람은 12월 20일 길거리에서 살갗이 한 점씩 도려지고 목이 잘렸다.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보낸 국서도 가짜였다. 1636년 인조 14년 일본으로 간 통신사 정사 임계와 부사 김세렴에게 막부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털어놓았다. "간사한 역적이 부도(不道)한 짓을 되풀이하여 국서(國書)와 도장을 고치고 바꾸어 두 나라를 속였다. '일본국(日本國)' 글자 밑에 '왕(王)'자를 덧붙였고, 국서에만 쓰는 도장을 맘대로 팠고, 귀국이 보낸 예단(禮單) 목록을 늘렸다. 그밖에 교묘히 어긴 것이 하나만이 아니어서(하략)."(김세렴, '해사록(海槎錄)', 1636년) 조선이 목매달던 2건, 국서와 범인 송환은 모두 가짜였다. 대마도주 소요시토시가 일본이 사과를 먼저 하고 조선이 수교를 요청한 것으로 문서를 뜯어고친 것이다. 돌이킬 수 없었고, 돌이키지도 않았다. 이를 '야나가와 사건(柳川一件)'이라 한다.

쇄환사를 통해 귀국한 피로인은 1607년 1400여 명, 1617년 321명, 1624년 146명이다.(김정호, '사행록을 통해 본 피랍조선인 쇄환교섭의 정치외교사적 특성') 합쳐도 사명당이 데려온 3000명에 못 미친다. 돌아가면 천민으로 천대받거나, 북쪽 국경으로 가서 군역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10만 피로인 대부분이 귀국을 거부했다. 비겁한 군주가, 명분에 집착해, 하늘 같은 민(民)을 짚신짝 취급한 탓이다. 그 가소로움을 보려면, 텅 빈 선정릉을 보면 된다.

병역 의무 무시하더니 4만 대군이 전멸했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326-4번지 산기슭에 집이 한 채 앉아 있다. 인도도 없는 도로에 홍살문이 솟아 있고 그 너머 한 칸짜리 기와집이 있다. 사당이다. 정충묘(精忠廟)라 한다.

음력 정월 초사흘이면 광주 이씨 부원군파 집성촌인 초월읍 쌍령리 사람들은 정충묘에 제사를 지낸다. 381년 전 마을 앞 고개에서 조선군이 청나라 부대와 싸우다 패배한 날이다. 사당에는 그 지휘관 4명을 모셨다. 전투 이름은 쌍령(雙嶺) 전투다. 병자호란 때 벌어진 전투다.

그런데 숫자가 어이없다. 청나라 기마부대는 병력이 삼백(三百)이었고 조선군은 사만(四萬) 대군이었다. 이들이 전멸했다. 오만에 빠진 조선 정부가 무(武)를 천시하고 세상을 제대로 읽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대륙에는 만주족이 흥한 지 오래였다. 명나라는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선조 뒤를 이은 광해군은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했다. 1623년 5월 8일 광해군이 권좌에서 쫓겨났다. 광해군의 먼 조카 이종(李倧)을 왕위에 앉힌 반정 세력은 외교정책을 반금친명(反金親明)으로 전환했다. 패륜(悖倫)을 이유로 반정을 일으켰으니, 황제국 명(明)을 섬겨야 논리에 맞았다. 1627년 후금 왕 홍타이치가 조선을 침략했다. 정묘호란이다. 조선은 후금을 형이라 부르기로 하고 항복했다.

1636년 4월 11일 후금이 청(淸)으로 개명하고 홍타이지가 황제에 즉위했다. 심양에서 열린 즉위식에서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광해군 조카 이종, 인조는 "우리는 명나라 동쪽 신하국(事中朝稱東藩)"(1636년 6월 17일 인조실록)이라고 후금에 큰소리쳤다. 백성에게는 "국토가 수천 리인데 앉아서 모욕을 받아야 하겠는가(坐受其辱哉)"라고 담화문을 발표했다.(1636년 5월 26일 인조실록) 이윽고 청나라가 압록강을 건넜다. 병자년 12월 9일(양력으로는 1637년 1월 4일이다), 두 번째 호란이다. 조선은, 쉽게 당했다.

강화도로 도망가려던 전시 정부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식량은 절약해도 70일 치밖에 없었다.(연려실기술) 12월 16일 산성이 포위됐다. 심리전이 벌어졌다. 청군은 왕자와 대신(大臣)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조선 정부는 왕실 종친 한 명을 왕자로, 형조판서 심즙을 대신으로 위장해 내보냈다. 명분을 중시하는 위대한 사대부 심즙이 적에게 말했다. "평생 충(忠)과 신(信)을 말해왔다. 나는 대신이 아니고 저자는 왕자가 아니다." 놀란 종친이 손사래를 치며 "우리는 왕자요 대신"이라고 하자 적장 마부대가 포로 두 명을 죽였다.(나만갑, '병자록') 심리전 참패. 그날 인조는 비밀문서를 각 도에 보내 총동원령을 내렸다(蠟書徵諸道兵).

총동원령에 각 도가 호응했다. 양반, 상놈, 노비 할 것 없이 관찰사가 모은 장정들이다. 정월 초사흘, 영남에서 소집된 근왕군(勤王軍)이 산성 남동쪽 광주 쌍령에 도착했다. 지휘관은 경상 관찰사 심연, 선봉장은 좌병마절도사 허완과 우병마절도사 민영이었다. 허완은 68세였고 민영은 50세였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들이 소집한 병력은 모두 4만 명이었다. 한겨울에 동원된 병력이 천 리 길을 쉬지 않고 행군했다. 군량이 확보되지 않고 군사도 절반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관찰사 심연이 파견한 종사관 도경유는 주야로 행군을 재촉했다. 도경유는 한성부 서윤, 그러니까 부시장 아래 문관이었다. 우병마사 민영의 부관 박충겸이 항의하자 도경유는 박충겸을 참수했다.(연려실기술) 종전 후 도경유는 전투 중 도주 혐의로 유배형을 받았다가 노중에 암살당했다.(1637년 5월 21일 인조실록)

쌍령에 도착했다. 허완은 고개 왼쪽(동쪽) 낮은 곳, 민영은 서쪽 산등성이에 진을 쳤다. 안동 영장 선세강이 "평지에 진을 치면 위험하다"고 했다. 종사관 도경유는 "하루 쉬고 내일 바로 산성으로 출정한다"고 선언했다. 노병(老兵)이 상관인 마흔한 살 먹은 문관을 당해내지 못했다. 허완은 "능선은 방한복이 없는 군사들에게 춥다"며 평지에 목책(木柵)을 세우고 진지를 구축했다. 허완은 "병법을 모르는 문관 지시를 따르니 어찌 승리하겠는가"라 탄식했다.(박광운, '병자호란과 쌍령전투', 정충묘지) 그리하여 정월 초사흗날, 원균이 벌인 칠천량 전투(임진왜란)에 버금가는 전쟁사상 최악의 졸전이 벌어졌다. 당시 공조참의 나만갑이 쓴 '병자록' 중 '기각처근왕사(記各處勤王事)'를 인용해본다.

'(허완은) 정포수는 가운데 두고 중등, 하등 포수는 바깥에 몰아 놓았다. 화약을 2냥씩(조총 10발 사격분) 나눠줬다. 1월 3일 이른 아침 적 선봉 33명이 방패를 가지고 남산 상봉(上峯)에서 줄지어 내려왔다. 최전방에 있는 하등포수가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떨어졌다. 포수들은 화약을 더 달라고 연달아 소리쳤다. 적이 이 말을 알아듣고 다시 재촉하여 앞으로 나와 목책 가까이 왔다. 안동 영장 선세강이 홀로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목방패에 맞았고 화살은 다 되니 적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적병이 목책 안으로 쳐들어오니 중등 포수는 총 한번 쏘지 못하고 무너졌다. 허완은 세 번이나 부축하여 말에 태웠으나 번번이 떨어져 밟혀 죽었다. 쓰러진 시체가 목책과 가지런히 쌓여 있으니 적병이 짧은 무기로 함부로 찍었다.

민영 진영 또한 급히 서두르다가 화승(火繩)이 화약더미에 떨어졌다. 화약이 폭발했다. 적이 이때를 틈타 총돌격하니 전군이 전멸되고 민영도 죽었다. 적이 죽은 자 옷을 벗기고 불을 놓아 태우고 갔다. 마침내 적 300여 기병에게 좌우 양진이 격파되었다.' 실록은 '허완은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패하여 죽었으며 민영은 힘껏 싸우다 역시 패하여 죽었다'고 기록했다.(1637년 1월 15일 인조실록) 수습한 시신은 100분의 1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길에 버려져서 까마귀나 개가 제멋대로 뜯어 먹어 백골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1637년 4월 7일 승정원일기)

4만 대군이 큰 고개 아래 진을 쳤다가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적군 300명에게 몰살당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이보다 44년 전 임진왜란 초기 선조를 알현한 명나라 병부 관리 유황상이 선조에게 이리 말했다.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었지만(貴國自高句麗 號稱强國)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변란을 초래한 것이다(唯事耕田讀書 馴致此變)."(1593년 6월 5일 선조실록) 유황상 보직은 병부 원외(員外)다. 정원외 하급 관리에게 조롱을 당할 만큼 조선은 약했다.이보다 300년 전 고려 때도 똑같은 대화가 기록돼 있다. 1291년 2월 19일 합단(哈丹)이 고려 북쪽을 침범했다. 고려가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자 몽골 황제 쿠빌라이가 반문했다. "당 태종도 이기지 못했던(唐太宗親征尙不克) 너희다. 우리가 정벌할 때도 쉽게 이기지 못했다. 그런데 이 조그만 도둑을 그렇게 심히 두려워하느냐?" 고려 사신 오인영은 "나라 성쇠함이 옛날과 같지 않다(古今盛衰 不同爾)"고 답했다.(1291년 고려사 세가 충렬왕 17년 2월) 지휘도 미숙했다. 훈련도 미비했다. 근본 문제는 문약(文弱)한 시스템이었다. 그 시스템이 옳다고 끝까지 자만했던 최고 지휘부가 문제였다.

조선 병역은 원래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였다. 16세부터 환갑까지 상놈이든 사대부든 남자는 해마다 일정 기간 병역을 치러야 했다. 인생의 44년이 병역 의무 기간이다. 정도전이 만든 시스템이다. 그런데 개국 후 200년 가까이 전쟁이 없다보니 군역을 옷감이나 곡식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늘었다. 남을 사서 대신 군에 보내는 대립군(代立軍)이 성행했다.

사대부 또한 병역 의무가 있었으나, 공부하는 사대부 유생(儒生)은 군 입대가 면제되거나 연기됐다. 관원이 된 사람도 병역이 면제됐다.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다는 율곡 이이 또한 군에 가지 않았다. 이이는 13세에 장원급제하고 50세에 죽었다.

유생은 성균관이나 지방 향교(鄕校)에 등록된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지금 유생들은 다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들입니다(今之校生 皆避軍役者也). 사족 자제는 명칭은 유업(儒業)을 한다고 하면서도 향교에는 다니지 않습니다(名爲業儒 而不赴鄕校)."(1536년 1월 11일 중종실록) 군 입대를 회피하기 위해 향교에 위장 등록을 하는 자들이 많다는 논의다. 56년 뒤 임진왜란이 터졌다.

1626년 인조에게 사헌부가 이런 요구를 한다. "향교에 등록된 자들이 거의 사족이니, 이들을 군에 보내면 사지에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게 여길 것입니다(則其視充保 無異於就死地). 과거에 떨어진 자 중 사족이 분명한 자는 군보로 충정하지 말고 별도로 명목을 만들어 인심을 위로하게 하소서."(1626년 8월 10일 인조실록) 과거 재수생도 군대를 면제시켜 달라는 요구였다. 인조는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준 공신들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터졌다. 또 9년 뒤 병자호란이 터졌다. 결과는 우리 모두 잘 안다.

지휘관들은 노병들이었다. 실제 지휘는 문관 도경유가 했다. 근왕병으로 차출된 사람들은 양인들이었다. 농사를 짓다가 급하게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속오군(束伍軍)이라 한다. 양인(良人)은 노비를 제외한 모든 이를 뜻한다. 공부하는 유생들은 빠졌다. 오히려 주인 따라 참전한 노비들이 많았다. 무기도 제대로 못 챙기고 엄동설한에 홑옷 입고 달려온, 오합지졸이었다. 대부분 퇴역 군관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무보직 무과 합격자들이 모집해 급조한 의병이나 속오병들이었다.(박광운, '병자호란과 쌍령 전투')

군대에 가면 선비들은 사지에 몰린다는 사람들이, 오합지졸은 전쟁에 내보내 백골로 흩어버리는 사람들이 나라를 경영했다. 그 꼬라지를 차량 붐비는 3번 국도 쌍령리 정충묘에서 보았다.

 

임진왜란 7년 전인 1585년 7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스스로 최고위직인 관백(關白)에 오르며 중국 침략 계획을 공개했다. 이듬해 5월 일본을 찾은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코엘료에게 그는 "명과 조선 침략을 위해 군함 2척을 건조해 달라"고 요청했다.(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히데요시는 국내외로 전쟁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이를 준비했다. 이후 일본과 조선 역사는 히데요시의 광기(狂氣) 속으로 내몰렸다. 징조는 곳곳에서 보였고, 전쟁은 터졌다. 히데요시의 광기가 뿜어낸 징조와 그에 대처했던 조선 지도부의 자세는 이러했다.

1587년 2월 전남 고흥반도 앞바다 녹도에 왜구 배 다섯 척이 들어왔다. 섬을 지키던 녹도만호 이대원이 이들을 퇴치하자 며칠 뒤 왜구는 열여덟 척 함대를 만들어 녹도 남쪽 80리 손죽도를 침략했다. 전라좌수군이 총출동했다.

사흘 밤낮으로 싸웠는데 싸우는 배는 이대원이 탄 배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배들은 감히 싸우려 하지 않았다. 혼자 남은 이대원은 뭍으로 끌려가 왜구 손에 죽었다.

왜 조선군은 전의를 상실했는가. '다른 배들은 '철환(鐵丸)'을 두려워하여 모두 도주하였다(諸鎭船畏鐵丸皆退走).'(김제민, '오봉선생집' 1권, '悲李大源·이대원을 슬퍼함') 조총(鳥銃)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화력 군단이 나타난 것이다. 왜구는 강진 앞 선산도와 마도진, 가리포진을 휩쓸고 퇴각했다. 조선 정부는 이후 전라도 방어력 강화를 위해 전라도 가리포와 진도 등지 해안에 성을 쌓았다.

서기 1592년 4월 충주에서 벌어진 탄금대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전투였다. 문경새재의 전략적 중요성을 팽개치고 조총 부대를 무시한 탓에 조선 육군은 궤멸됐다. 사진은 전쟁 후 건설한 새재 2관문이다. 두 달 뒤 용인에서 벌어진 또 다른 전투에서 6만 조선군은 1600명에 불과한 일본군에 '산이 무너지듯' 또다시 궤멸됐다. 전투력과 전술을 감안하지 않고 전쟁하는 법을 생각하지 않은 탓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때 조선 백성은 '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밤에 나와 조선군이 버리고 간 옷과 쌀을 주워 모아 생계를 유지했다'. 

어느 날 선조가 공조판서 겸 도총관 변협에게 물었다. "만약 우리나라가 전라도에 주력하는 줄을 알고 딴 도(道)로 들어오면 어찌할 것인가?" 도총관이 답했다. "대적(大賊)이 어느 곳엔들 들어오지 못하겠습니까."(1589년 8월 1일 '선조실록') 3년 뒤 '대적' 히데요시는 15만 대군을 전라도가 아닌 경상도 부산포로 상륙시켰다. 최전방 부대는 전라좌수군을 공포에 떨게 한 조총부대였다. 완전히 허를 찔린 것이다.

손죽도 왜변이 마무리되고 다음 달 동래부사 노준(盧埈)이 파직됐다. 실록 기록은 이러하다. '동래부사 노준은 술에 빠져 공무를 살피지 않고 왜인들 선박에 쌀을 지급할 때 작폐가 적지 않아 왜관 내 왜인들로 하여금 억울하다는 말을 하게 만드니, 파직하소서.'(1587년 3월 3일 '선조실록') 요컨대, 게으르고 부정부패를 저질러 말썽을 피운다는 내용이었다. 선조는 한 달 뒤 부사를 교체했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면피용 보고서다. 후임 부사 이정암이 남긴 기록은 실록과 '아주 많이' 차이가 난다.

'지난해 왜변 이후 왜구가 대거 쳐들어온다는 말이 크게 떠돌았다. 전임 부사 노준은 대처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간관들이 탄핵하여 파면시키고 내가 임명됐다(自上年倭變之後 聲言大擧入寇前府使盧埈 處事失宜 言官劾罷 以余代之).'(이정암, '사류재집'8, '행년일기'上) 노준이 흉흉한 민심을 잠재우지 못해 파면됐다는 말이다. 때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었지만 정부는 위기를 은폐하기에 급급했다.(김덕진, '1587년 손죽도왜변과 임진왜란', 2010)

'서울 선비들이 백 명 천 명 떼로 미친 짓을 하는데, 해괴하기 짝이 없다. 무당 흉내를 내면서 노래하며 춤추기도 하고, 장사 치르듯 껑충거리고 흙을 다지기도 하며, 동서로 달렸다 웃었다 울었다 하였다. 저희끼리 큰 소리로 묻고 답하기를 "장상(將相)들이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어서 웃는다. 국가가 위태롭고 망해 가고 있어서 우는 거다" 하며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곤 했다.'(조경남, '난중잡록'1 1588년) 바다 건너편에서 몰아닥치는 광기에 많은 사람이 넋을 놓았다. 영의정 이산해 아들 이경전도 있었고 우의정 정언신 아들 정협도 있었다.

저렇게 덜떨어진 자들만 있었다면 나라 꼬라지는 언급할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나주에 있던 김천일은 왜변 소식을 듣고 스스로 마술(馬術)과 궁술을 익혔고 제자들에게 병마(兵馬)를 훈련시켰다. 남원 선비 안영은 칼을 사서 보관하였고 유팽로라는 선비는 대장간을 만들어 날마다 무기를 만들고 군복을 제작하고 군량미 수백 석을 비축했다. 1591년 금산 대둔산을 찾은 조헌은 "내년에 필히 왜란이 있으니 같이 싸우자"고 승려들과 결의했다.(김집, '신독재선생유고'12, '중봉조선생시장') 이들이 의병장들이다. 안영과 유팽로는 1592년 4월 20일 또 다른 의병장 고경명 부대에 합류해 의병을 일으켰고, 김천일은 5월 6일 나주에서 거병했다. 조헌 또한 그 5월에 옥천에서 거병했다. 전쟁이 터지고 불과 한 달 사이다. 전쟁이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국 팔도에서 일어난 의병은 이렇게 '준비된' 군사들이었지 분노와 애국심만으로 일어난 나약한 지식인이 아니었다.(김덕진, 앞 논문) 경상도의 곽재우와 함께 고경명·김천일·조헌은 임진4충신(壬辰四忠臣)이라 불린다.

1591년 여름 부산포 왜관에 머물던 왜인 수십 명이 점차 돌아갔다. 마침내 한 관(館)이 텅 비게 되니 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징비록') 문득, 조선에 체류하던 왜인이 모두 철수했다. 1592년 4월 13일 마침내 전쟁이 터졌다.

전라도에 집중돼 있는 조선군을 피해 일본군은 부산포로 상륙했다. 부산과 동래 민관군이 전멸했다. 4월 28일 순변사 신립이 지휘한 8000 조선군이 충주에서 전멸했다. 기병술에 능했던 신립은 요새지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평지를 택했다. 충주벌 논은 진흙탕이었다. 조선군이 방치한 텅 빈 새재를 일본군은'노래하고 춤추며 통과해[乃歌舞而過·'징비록']' 흙탕에 빠져 있는 조선군을 도륙했다. 선조는 수도를 버리고 명나라를 향해 야반도주했다. 한성 성민은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6월 용인에서 6만 조선군과 일본 해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1600 일본군이 맞붙었다. 조선군은 하삼도(충청·전라·경상)에서 모집된 병력이었다. 지휘관인 삼도 관찰사 김수, 이광, 윤선각이 평안도 용천에 있는 선조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싸울 계책을 조정에서 알려 달라"는 것이다. 농사짓다 소집된 6만 오합지졸보다 더 전쟁을 모르는 지휘관들이었다. 그럼에도 총사령관 이광은 아군 병력 규모에 자만했고, 적군 전투력에 무지했다.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갈 때 적병이 산골짜기를 따라 공격했다. 흰 말을 타고 쇠가면을 쓴 장수가 칼날을 번뜩이며 앞장서니, 충청 병사 신익이 먼저 도망했다. 10만 군사가 차례로 무너져 흩어졌다.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 듯하였다. 모두 단기(單騎)로 남쪽을 향하여 도망하니, 적병 역시 추격하지 않았다. 병기와 갑옷, 마초와 양식을 버린 것이 산더미와 같았는데 적이 모두 태워버리고 떠났다.'(1592년 6월 1일 '선조수정실록') 류성룡은 이리 적었다. '문관 3인이 군사를 봄놀이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軍行如春遊 安得不敗者也).'('징비록')

기억나지 않는가. 5년 전 고흥 앞바다에서 달아났던 그 용렬한 지휘관들이. 선조는 며칠 동안 입 밖에 꺼내지 않았던 명나라 망명 계획을 다시 언급하기 시작했다.

'15만 일본 병사 가운데 5만명이 죽었다. 전사자는 소수고 대부분 과로, 기아, 추위, 질병으로 죽었다.' 징용된 일본 남자들은 '불안과 고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칼을 뽑아 할복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고, 여자들은 아비나 남편을 못 만나리라 여기고 울며 슬퍼하였다.'(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광기에 조선은 물론 일본 민간인도 큰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조선과 비교할 수는 없다. 조선은 임진왜란 7년 동안 그 미친 짓이 벌어진 전쟁터였다. 민간 희생은 말하기도 끔찍하다. 예컨대, 거지처럼 산 사람들.

'용인전투 현장에는 활과 화살, 칼, 창, 곡식, 의복, 장식이 낭자하게 버려져 개울을 메우고 골짜기에 가득하여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산골짜기에 숨었던 촌민들 가운데 밤을 틈타 이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여 산 자가 매우 많았다.'(박동량, '기재사초' 임진일록 7월) 평양전투에서 패전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한성 도성 백성을 모조리 죽였다.(1593년 1월 1일 '선조수정실록')

또 거지처럼 살지도 못한 사람들. '거지가 매우 드물다. 두어 달 사이에 다 굶어 죽었기 때문에(數月內已盡餓死) 걸식하는 사람이 보기 드물다고 한다. 혼자 가는 사람이 있으면 산짐승처럼 거리낌 없이 쫓아가 죽여 잡아먹는다니 사람 씨가 말라 버리겠다.'(오희문, '쇄미록', 1594년 4월 3일)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히데요시의 광기는 자기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고, 조선 백성을 바닥 없는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전쟁터가 한반도 안에 있는 한, 이겨도 피해는 넓고 깊다.

427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전쟁을 치를 것인가. 광기(狂氣)는 임진년보다 강하다. 전선은 대한민국에 초집중돼 있다. 지도부 자세는 어떠한가. 자신하는가, 혹은 자만하는가. 어떤 무기와 어떤 전술로 광기에 대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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