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6. 17:14ㆍ漢詩를 맛보다
太史公牛馬走, 司馬遷再拜言少卿足下。
사람들의 부림을 받는 소나 말과 다를바가 없는 천한 사람 태사 사마천이 삼가 少卿에게 재배하여 말씀드립니다
曩者辱賜書, 敎以順於接物, 推賢進士爲務。
지난번에 송구스럽게도 서신을 보내셔서 교유관계를 신중히 하고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는데 힘쓰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意氣懃懃懇懇, 若望僕不相師, 而用流俗人之言, 僕非敢如此也?
간곡한 뜻을 가지고 제가 따르지 않음을 책망하시는 듯했는데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의 말을 좇아 제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중략)
僕竊不遜, 近自託於無能之辭, 網羅天下放失舊聞, 略考其行事, 綜其終始, 稽其成敗興壞之紀。
요즈음 저는 불손하게도 잘쓰지도 못하는 문장에 기탁하여 예부터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누락된 이야기를 망라하여 그 행사를 고증하고 시작과 결말을 종합하여 성공과 실패 그리고 흥성과 쇠망의 이치를 고찰했습니다
上計軒轅, 下至於玆, 爲十表, 本紀十二, 書八章, 世家三十, 列傳七十, 凡百三十篇, 亦欲以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그리하여 위로는 헌원(황제) 에서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表10편,本紀12편,書8장,世家30장,列傳70편
등 모두 130편을 지어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궁구하고 고금의 변화를 통하여 일가의 문장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草創未就, 會遭此禍。
그러나 초고를 작성하기도 전에 이런 재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惜其不成, 是以就極刑而無慍色。
이 일을 다 완성하지 못한것을 애석하게 여겼기 때문에 극형을 당했으면서도 노기를 띠지 않았던 것입니다
僕誠以著此書, 藏諸名山, 傳之其人, 通邑大都, 則僕償前辱之責。
제가 이 책을 저술하여 명산에 간직해 두었다가 저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에게 전하여 모든 고을과 도시에 알릴수만 있게 된다면 제가 이전에 욕됨을 참고 자결하지 않았다는 빚을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雖萬被戮, 豈有悔哉?
비록 수만번 죽임을 당해도 어찌 후회스러움이 있겠습니까
然此可爲智者道, 難爲俗人言也。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이러한 말을 할수있지만 일반사람에게는 하기가 어렵습니다
且負下未易居, 下流多謗議. 僕以口語遇遭此禍, 重爲鄕里所戮笑, 以汗辱先人, 亦何面目復上父母丘墓乎?
또한 죄를 지은 자는 처신하기가 어려우며 천박한 사람은 비방받기가 쉬운 법입니다
제가 말로 인해 이러한 화를 입고 마을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조상을 욕되게 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가겠습니까
雖累百世, 垢彌甚耳。是以腸一日而九迴, 居則忽忽若有所亡, 出則不知其所往。
수많은 세월이 쌓인다 해도 허물만 더 심해질뿐입니다
이런 까닭에 근심스런 마음이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되고 집에 있으면 정신이 몽롱하여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 같으며 문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할바를 모르겠습니다
每念斯恥, 汗未嘗不發背沾衣也。
매번 이러한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身直爲閨閤之臣, 寧得自引於深藏岩穴邪?
몸이 환관과 같은 신하가 되었으니 어찌 스스로 은거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故且從俗浮沈, 與時俯仰, 以通其狂惑。
그래서 잠시 세상의 부침을 따르고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여 광란과 미혹에 빠진 사람들과 교유하고 있습니다
今少卿乃敎以推賢進士, 無乃與僕私心刺謬乎?
지금 소경께서는 저에게 현인을 추천하고 선비를 천거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今雖欲自雕琢曼辭以自飾, 無益於俗, 不信, 適足取辱耳.
지금 비록 제가 미사여구로 제자신을 수식한다 해도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않고 사람들도 불신할것이니 도리어 스스로 부끄러움을 취하게 될뿐입니다
要之, 死日然後是非乃定. 書不能悉意, 略陳固陋, 謹再拜.
결국 죽은후에나 옳고 그름이 정해질 것입니다
글로써는 저의 생각을 다 쓸 수 없지만 고무한 생각을 간략하게 적으며 삼가 재배드립니다
司馬遷
그는 BC 140~110년 한(漢)의 조정에서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사령이란 천문관측, 달력의 개편, 국가 대사(大事)와 조정 의례(儀禮)의 기록 등을 맡는 직책이었다.
사마천은 젊어서 여러 지역을 여행한 뒤에 조정의 관리가 되었고, BC 111년 중국 남서부지방의 군사원정에 참여했다 BC 110년 황제가 국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례인 봉선(封禪)을 거행하기 위해 타이 산[泰山]으로 갈 때 수행원의 자격으로 따라갔다. 그해 아버지가 죽었고, 의무적인 상례기간이 지난 후인 BC 10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BC 105년 무제(武帝)의 즉위가 한나라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중국 달력의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어 사마천이 이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이었던, 중국 역사서의 집필에 착수했다. 역사서 집필에 대한 열망은 무제의 통치하에서 중국의 발전이 절정기에 달했으므로, 그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해서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겠다는 믿음으로 인해 한층 강해졌다. 그러나 역사서를 완성하기도 전에 당시 평판이 나쁘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황제 비방혐의로 심문을 당했다. 무제가 그를 죽이기에는 아까운 인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마천 자신이 역사서를 완성하기 위해 처형의 연기를 간청했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처형되는 대신 궁형(宮刑:去勢刑)을 선고받았다. 훗날 무제의 화가 누그러지자 다시 황실의 총애를 받아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당한 치욕을 잊지 못한 채 은퇴해서 역사서 완성에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