燕山君

2022. 5. 13. 17:06나는 王이로다

재위 1494.12.29. - 1506.9.2. (12)

재세 147611.6.-1506.11.6.(30)

부인- 4, -6(4,2)

-거창군부인 신씨-21(폐세자 황,창녕대군,휘신공주)

-숙의이씨-1, 숙용장씨(장녹수)-1, 후궁-1

 

연산군묘(방학동)

 

연산군 친어머니인 성종 왕비 윤씨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궁에서 쫓겨나고 훗날 사약을 받아 죽었다.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연산군은 그 전에도 그 뒤에도 세상이 경험해보지 못한 광적인 폭정을 거듭하다 쫓겨났다. 지도자가 자격 미달이면 참모들이 그 부족함을 채워야 하는데, 연산군 아래에는 그런 이가 드물었다. 트라우마는 포악함을 잉태하고 포악한 성정은 폭정으로 증폭됐다. 오래도록 온 백성이 학정에 신음한 뒤에야 폭정은 물리적으로 진압됐다. 그런데 폭군 아래에는 간신이 판친다. 역사 법칙이 그렇다.

장면1: 간신들의 파티

서기 1504년 음력 윤4월 20일 조정에서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왕은 연산군이었다. 회의 안건은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 사사 사건 주모자 처형 문제였다. 주모자로 드러난 윤필상과 이극균은 이미 사약을 먹고 죽은 뒤였다. 그런데 이들은 "윤필상은 죄가 엄중한데도 목을 베지 않고 사약만 내렸고, 이극균 또한 죽을 때 반성 기미가 없었으니 사약은 부족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들이 이런 결론을 연산군에게 올리자 왕이 답했다. "참시(斬屍)하라." 시체 목을 베라는 명이다. 그리고 정승들은 이렇게 연산군에게 권했다. "이보다 더한 경사가 없으니 잔치를 벌입시다!" 연산군은 술을 꺼내 관리들과 파티를 벌였다.('연산군일기')

이날 참시를 권하고 함께 잔치를 벌인 사람은 유순, 허침, 박숭질, 박건, 강귀손, 신준, 이계동, 이집, 정미수, 김수동, 김감, 안처량, 임사홍, 이점, 한형윤, 허집, 유빈, 노공유, 이복선, 성희안, 이과, 정광필, 이중현이었다.(1504년 윤4월 20일 '연산군일기')

장면2: 간신들의 쿠데타

2년 뒤 1506년 9월 2일 폭군 연산군이 쫓겨났다. 이복동생 진성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왕이 된 진성대군은 쿠데타 6일 뒤 반정 공신 우두머리 박원종이 올린 공신 명단에 서명해 발표했다.(1506년 9월 8일 '중종실록')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명명받은 반정 공신은 모두 117명이었다. 그 가운데 이런 이름들이 보인다. 유순, 박건, 신준, 정미수, 김수동, 김감, 유빈, 성희안. 바로 2년 전 봄날 폭군에게 적극 동조하고 함께 음주 파티를 벌였던 사람들 아닌가.

1509년 편찬된 '연산군일기'는 반정공신 성희안이 주도해 만든 기록이다. 그러니 반정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과장과 왜곡이 없을 수 없다. 연산군이 큰아버지인 월산대군의 아내 박씨와 간통했다는 기록(1504년 12월 9일 '연산군일기')은 대표적인 왜곡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겹겹이 포장된 과장을 걷어내더라도 그 시대는 미치광이의 시대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동산에 얽힌 탐욕이었다. 연산군은 서울 사방 행정구역을 몽땅 폐지해버렸다. 자기 사냥터로 만들기 위해서다. 동쪽으로는 한강 건너 삼전도와 광진, 묘적산, 추현, 천마산, 마산, 주엽산으로부터 북쪽은 석점, 홍복산, 해유점까지 서쪽은 파주 보곡현까지 남쪽은 한강 노량진, 용산 양화도까지가 금표를 세운 경계였다. 동쪽 70리, 서쪽 60리, 북쪽 65리, 남쪽 10리가 국가도 아니고 왕실도 아니고 연산군의 개인 토지였다.(1504년 11월 9일 '연산군일기') 실록은 '주민을 철거시켜 비운 뒤 사냥터로 삼고, 어기는 자는 목을 베 조리돌리고, 수도 주변 수백 리를 풀밭으로 만들어 금수를 기르는 마당으로 삼았다'고 기록했다.(1506년 9월 2일 '연산군일기') 그 경계는 금표(禁標)가 세워졌다.

기록으로 전해오던 이 조치는 1994년 11월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서 '禁標內犯入者 論棄毁制書律處斬(금표내범입자논기훼제서율처참: 금표 내에 침범한 자는 기훼제서율에 따라 참형에 처한다)'고 새겨진 비석이 발견되면서 사실로 드러났다. '기훼제서율'은 임금이 정한 법률을 어기는 죄다.

연산군은 "위를 업신여기는 풍습(陵上之風·능상지풍)을 고쳐 없애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기 권력에 거스르는 일체의 말과 행동을 '능상지풍'이라 규정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지도자였다.

이미 삐뚤어지기로 작정한 왕이기도 했다. 사간원 관리 이충걸과 김승조가 "오랫동안 경연(經筵·신하들과 경전을 읽는 공부)을 하지 않았으니 옳지 못하다"고 고했다. 연산군은 이렇게 답했다. "어진 신하들이 조정에 가득하니 내가 어질지 못하다고 하는 게지. 어질지 못한 내가 임금 자리나 채우고 있을 뿐인데 어진 신하들과 뻔뻔스럽게 경연을 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 않겠다."(1504년 4월 23일 '연산군일기') 말을 들은 신하들은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니뭐니 해도 연산군 시대 가장 중대한 이슈는 폐비 윤씨 관련 문제였다. 폐비에 얽힌 사람들은 현대 소설가들의 상상력으로도 만들 수 없는 끔찍한 형벌을 받았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각종 형벌 외에 연산군 시대 형벌에는 손바닥 뚫기(천장), 불로 지지기(낙신), 가슴 빠개기(착흉), 뼈 바르기(과골), 마디마디 자르기(촌참), 배 가르기(고복) 등이 실록에 기록돼 있다. 이 가운데 죽은 자를 거듭해서 다시 죽이는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碎骨飄風·쇄골표풍)'형은 창의성에서는 으뜸이다. 아버지 성종의 유모였던 봉보부인 백씨는 바로 이 쇄골표풍형으로 세 번이나 죽었다.

백씨 이름은 어리니(於里尼)다. 성종 유모로 궁궐에 들어왔다가 1479년 왕비 윤씨의 수상한 행동을 성종에게 일러바쳤던 여자다. 훗날 연산군이 어리니가 한 짓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1504년 4월 23일 연산군은 이렇게 명했다. "모의에 참여한 어리니를 부관참시하라." 이미 어리니는 1490년 죽고 없었지만 연산군은 기어이 그녀를 관에서 끄집어내 목을 베라고 명했다. 남편 강선은 곤장 100대를 때려 유배를 보내고 재산은 몰수해버렸다. 끝난 게 아니었다.

5월 1일 승정원에서 곤혹스러운 보고가 올라왔다. "전하께서는 김제신만 목을 베서 거리에 걸라고 하셨는데, 명단 작성이 잘못돼 의금부에 어리니도 효수하라고 명이 내려갔나이다." 잘못 적힌 명단에 이미 연산군 결재가 난 뒤였다. 그러자 연산군은 시원하게 이리 답했다. "함께 목을 매달아라."

그렇게 어리니는 늙어서 한 번 죽고, 부관참시로 또 한 번 죽고, 잘못된 명단으로 또 한 번 죽었다. 8월 19일 내친김에 연산군은 남편 강선의 형을 곤장에서 능지처사(陵遲處死·살을 천천히 도려내 죽임)로 올리고 아들은 목을 베라고 명했다.

그런데 또 끝이 아니었다. 이듬해 1월 26일 연산군은 거리에 내걸려 있던 어리니 목과 시신을 거두어 "뼈를 부수고 가루를 강 건너에 날리라"고 명했다. '명단 착오'라는 보고가 올라왔지만, 이를 깃털처럼 무시해버린 폭군은 이미 영혼조차 없어지고 형체도 찾을 수 없는 한 여자의 시신을 바람에 날려버린 것이다. 그해 가을 연산군은 어리니 남편 강선의 여종 종가(從加)가 강선이 허물이 없다고 주장하자 그녀 또한 처형하라고 명했다. 실록은 "'시체를 자르고 쪼개는 형벌(刳剔其屍·고척기시)'은 이때 비롯됐다"며 "사람을 형벌할 때 교살(絞殺)한 뒤 또 목을 베고, 그러고도 부족하여 사지를 찢으며, 찢고도 부족하여 마디마디 자르고, 배를 가르는 형을 썼다"고 기록했다.(1505년 10월 3일 '연산군일기')

명분과 의리로 먹고산다는 조선 선비들로서, 이 정도 광기라면 그 자리에서 이를 통박하는 긍정적인 광기가 나와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연산군이 사약을 먹인 폐비 사건 주동자 이극균과 윤필상의 목을 한 번 더 베자고 청한 이들도 그 선비들이었다. 한 달 뒤 "이런 경사가 없다"며 잔치를 벌이자고 한 이들도 그 선비들이었다.

애꿎은 어리니가 목이 잘려 거리에 매달리고 석 달이 흘렀다. 8월 16일 의금부가 이렇게 보고했다. "어리니의 동성 삼촌까지 고문으로 조사했는데, 범위가 좁은 듯하나이다. 동성 6촌과 이성 4촌까지 아울러 국문하면 어떻겠나이까?" 폭군은 그리하라고 명했다.(1504년 8월 16일 '연산군일기') 어리니의 죄를 끄집어내던 4월 23일, 연산군이 이를 정승들에게 물으니 모두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라고 하였다. '모든 일을 먼저 정한 뒤에 회의에 넘기니 재상들은 다시 이의가 없고 모두 하교가 지당하다고만 했다.'(1504년 4월 23일 '연산군일기')

한 달 뒤인 윤4월 17일 연산군이 자기에게 쓴소리를 해대던 스승 조지서의 처벌을 물었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거만하고 패만하니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지서는 고문으로 죽은 뒤 목이 잘려 거리에 매달렸다.

이 모든 일을 앞장서서 주장한 자들이 앞에 나온 유순, 박건, 정미수, 김수동, 김감 같은 대신들이었다.

2년 뒤 진성대군을 앞세워 연산군을 타도한 자들도 바로 그 무리였다. 그들이 경회루에서 기생들과 흥청망청하는 동안 백성은 도탄에 빠져 신음했고 나라는 파탄이 났다. 전에도 이후에도 없던 풍경이었다.

 

'나는 王이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종  (0) 2022.05.19
중종  (0) 2022.05.15
성종  (0) 2022.04.21
덕종  (0) 2022.04.20
세조  (0) 2022.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