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2022. 4. 21. 10:13나는 王이로다

李娎()

재위 1469.11.28. - 1494.12.24. (19)

재세 1457.7.30.- 1494.12.24.(37)

부인- 17, -31(16 12)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연산군, 질투)

정비인 윤씨는 성종 4(1473) 3월 숙의 (淑儀)로 책봉되었다가 이듬해 5월 공혜왕후가 사망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성종 7(1476) 8). 그리고 석달 뒤 연산군이 태어남으로써 윤씨의 행복과 영광은 절정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1년 뒤 그녀는 비상(砒霜)을 숨겨놓은 것이 발각되어 빈()으로 강등되었고, 성종 10(1479) 6월 서인으로 폐출되었다가 3년 뒤에 결국 賜死되었다(성종 13 8).

-정현왕후 윤씨-12(진성대군(중종),순숙,신숙공주

-명빈 김씨-13, 귀인 정씨-21, 귀인 엄씨-1, 귀인 권씨-1, 귀인 남씨, 소의 이씨, 숙의 하씨, 숙의 홍씨-73, 숙용 정씨, 숙용 심씨-22, 숙용 권씨-1, 숙원 윤씨, 후궁-1, 후궁-1

-선릉(동원이강릉,성종,정현왕후윤씨,선정릉),순릉(공혜왕후한씨,파주삼릉),회묘(폐비윤씨)

세조 3(1457) 730일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 뒤에 덕종으로 추존)와 소혜왕후(昭惠王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는 이혈(李娎)이다.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는 이미 10여 년 전에 요절한 상태였기 때문에(145719세로 사망) 둘째 아들인 예종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 역시도 14개월 만에 붕어하고 말았다.

이런 돌발적 상황은 왕위 계승에 관련된 분쟁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짙게 드리우는 것이었다. 예종의 맏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은 너무 어려(당시 3) 왕위를 잇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반면 한명회신숙주 등을 중심으로 한 역대의 훈구대신들은 풍부한 경륜과 긴밀한 인맥을 바탕으로 광범하게 포진해 있었다.

왕실의 가장 어른으로 상당한 식견과 정치적 능력을 갖고 있던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는 지체 없이 성종을 후계자로 선정했다. 제안대군은 아직 강보에 싸여 있고 월산대군은 질병이 많지만, 자산군(者山君- 성종)은 그동안 세조가 늘 그의 기상과 도량을 칭찬해 태조에 견주기까지 했다는 이유였다.

신숙주, 한명회등 주요 대신들은 그 의견에 즉각 찬성했다. 이런 일치된 합의에 따라 그동안 왕위 계승과는 거의 무관한 위치에 있던 성종은 예종이 붕어한 그날 전격적으로 선정했다. (14691128).

성년이 된 재위 7(1476)  정희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끝나고 친정(親政)을 시작한 성종은 그런 시도를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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